폭풍 다음에 불 (下)
5. 객체 : 화폐
모든 인간 활동에 대한 속박이 우리의 적이다. 화폐의 논리가 우리의 관계를 속박한다. 화폐에 의한 속박은 특정한 사회적 응집의 형태다. 우리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사회적 응집을, 공통하기와 속박하기를 구분할 수 있다. 공통하기 : 우리들의 서로 다른 풍요 (나의 요리 기술, 당신의 야채 재배 기술, 그녀의 컴퓨터 프로그래밍 기술)를 자발적으로 결합하여 우리 활동의 생산물을 공유하는 것. 공통하기의 핵심은 자발적인 성격. 다채색 patchwork, 많은 세계들의 세계. 반면 속박하기는 우리의 사회적 상호관계에 특정한 성격과 특정한 동역학을 부여한다. 화폐는 우리의 모든 응집에 침범하여 모든 사회적 관계를 화폐화한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희망의 적을 자본이라고 말해왔다. 하지만 이 책은 화폐에서 시작할 것이다. ‘자본’이라는 말은 쉽사리 자본가계급의 집단을 암시한다. 자본가계급을 패배시키는 문제로 흘러가버린다. 물론 그것은 중요하지만 이 책은 우리의 사회적 관계가 현재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가, 자본가계급을 실존하게 하는 행동 패턴 속으로 우리를 몰아넣는 속박이 어떠한 것인가
의 문제에 더 초점을 맞춘다.
메모 : 이게 되게 휘둘리기 쉬운 방향이라고 생각되는데. 이 방향이 잘못됐다는 건 아니지만 (책에서도 자본가계급은 분명히 패배해야 한다고 언급하지만) ‘이게 다 저 자본가들 때문이다 저기에 불을 지르자’는 사실 밈에 가깝고⋯ 그 말을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진짜 진지하게 자본가계급 철폐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오히려 그 말을 뱉고 분노를 공중에 해소해 버림으로써 이어져야 할 다음 논의로 가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다른 책에서 읽었던 표현이지만 ‘과거에는 자본가-노동자의 구분이 있었다면 현대에는 4계층으로 나뉜다. 대기업의 노사와 영세기업의 노사가 그것이다’는 말도 생각났다. (정확한 문장은 아님) 그러니까 자본가 아닌 사람을 모두 노동자로 칭하기엔 그 사람들 사이에도 이미 계급이 나눠져 있고 전혀 균질한 집단이 아니라는 거지⋯ 단순하고 뚜렷한 적을 상상할 수록 진실에서는 멀어지는 게 아닐까.
a) 상품이 있으면 가치가 있다
이 사회에서 사회적으료 유효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선 풍요는 상품으로 존재해야 한다.
내가 훌륭한 요리를 했는데
- 친구들에게 대접하기 위한 용도였던 경우 : 친구들은 칭찬을 해줌으로써 나의 노력을 인정한다. 이때 음식의 사용가치는 내 친구들에게 먹일 유용성, 그리고 그들을 행복하게 할 유용성에서 온다.
- 판매하는 용도였던 경우 : 인정은 상품의 대가로 내가 받은 화폐량에 의해 표현된다. 이때 음식의 사용가치는 교환을 통한 인정에 종속된다. 음식의 맛이 아무리 좋았어도 교환 행위가 성공하지 못하면 음식은 그대로 쓰레기로 버려질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이 가치다.
내가 내 음식을 20kg의 밀가루와 지속적으로 교환해 왔는데, 밀가루 생산 기술이 발달하는 경우
- 밀가루는 훨씬 빠른 속도로 생산이 가능한데 내 음식은 그렇지 못하다면 내 음식의 교환 가치는 떨어진다
- 내 생산물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나는 더 빠르게 노동해야 한다
- 이것은 친구를-위한-요리-대접에는 적용되지 않던 논리. 친구들은 내가 요리를 빠르게 만들든 늦게 만들든 ‘너는 정말 훌륭한 요리사야!’ 라고 말해준다. 반면 상품 교환에서는 계속해서 같은 속도로 만든다면 언젠간 가치가 없어진다.
- 우리는 끊임없는 공격과 저항에 기초한 사회에 살고 있다. 더 빠르게-빠르게-빠르게의 동역학.
b) 상품 가치가 있으면 노동이 있다
노동의 이중성. 맑스는 추상노동과 구체노동을 구분한다. 구체노동은 어떤 사회에서나 있을 수 있는 활동들. 식탁을 만들고 음식을 요리하는 것. 풍요를 생산하고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활동. 추상노동은 상품 생산 속에서 또는 자본주의적 맥락에서 볼 수 있는 활동들. 노동자로 하여금 식탁을 더 빨리 만들게끔 그 과정의 작은 측면 중 하나에 전문화하도록 강제하는 것.
식탁을 만드는 것 역시 내가 쓰기 위해 만들거나 친구를 위해 만들거나, 마침 식탁이 필요했던 지나가는 사람에게 주기 위해 만들 수 있는데 (여기에는 사회적 응집은 있어도 속박은 없다) 이 활동이 추상노동이 되면 중요한 것은 식탁-상품의 판매 가능성이다. 식탁이 팔리지 않으면 나는 식탁을 더 빨리 생산하거나 더 저렴하게 생산하기 위한 방법을 알아봐야 한다. 우리의 활동은 시장의 힘, 판매 및 구매의 흐름에 구속되고 규정된다.
c) 상품-가치-노동이 있으면 화폐가 있다
상품(C) 화폐(M)
최초의 교환 행위는 상품-상품 (C-C)
그러나 상품의 교환이 일단 사회의 특징이 되면 하나의 특수한 상품(금)이 다른 모든 상품과 교환할 수 있는 보편적 등가물로 된다. 이것이 화폐로 발전한다. (C-M-C) 이것은 거래를 판매(C-M)와 구매(M-C)의 두 부분으로 나누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화폐는 교환 수단 이상이 되며 별개의 분리된 실존을 획득한다.
화폐는 단순히 빌이 톰에게서 토마토를 구입하고 톰이 그것을 사용하여 사라에게서 계란을 사는 문제가 아니다. 화폐가 토마토와 계란에서 분리된다는 사실 자체가 화폐에 자율성을 부여한다. 사라가 그녀의 화폐를 치즈를 사는 데 사용하지 않고 더 많은 화폐를 벌기 위해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이미 화폐의 존재에 새겨져 있다.
상품을 사기 위해 상품을 사거나(M-C-M) 상품을 아예 생략하고 화폐를 회수하기 위해 화폐를 빌려주는(M-M) 의 동역학이 생겨난다. 그러나 이 마지막 두 거래는 끝의 화폐(M’)이 최초의 화폐(M)보다 양적으로 더 커야만 의미가 있다. → 자기 확장의 동역학. 화폐의 자기 확장이 곧 자본이다.
d) 상품-가치-노동-화폐가 있으면 정체성이 있다
상품 교환 행위를 통해 우리는 주어진 역할들 속으로 떠밀리고 성격 가면이 우리의 얼굴에 씌워진다. 가면은 우리를 특정한 역할에 가두는 감옥이다. 교환하는 사람은 더 이상 사랑과 기억과 열정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단순히 하나의 역할로, 상품의 판매자 또는 구매자로 간주된다. 우리의 잠재적 생성은 고정된 정체성에 종속된다.
메모 : 동인 창작 행사가 너무너무 생각났던 파트. 창작물을 만들어 파는 사람도 ‘사랑과 기억과 열정’을 가진 사람이고, 이 행사에 온 참관객도 ‘사랑과 기억과 열정’을 가진 사람이다. 동인 행사 티켓 사기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아십니까 이거 선예매 티켓 못 구하면 현장예매해야 하는데 현장예매 대기줄 말도 안 되게 길어요 아침부터 세 시간씩 바닥에 죽치고 앉아 있음(⋯) 그들은 모두 작품과 캐릭터에 대한 사랑으로 이곳에 왔고 이것이 동인 행사의 핵심인데, 그러나 결국에는 그 매개체가 상품 교환 행위라는 점 때문에 생기는 애로사항도 밤하늘의 별처럼 많다. 되팔이도 많고 업자도 많고, 몇 년 전에는 대규모로 사기 사건도 있었고, 내가 왜 ‘물건이 잘 안 팔리는 판매자’ 포지션에 이렇게 놓여 있어야 하지?를 고민하는 창작자와 ‘나 사고 싶은 거 샀으면 됐지 왜 그 이상의 복잡한 맥락을 생각해야 하지?’ 하는 참관객의 혼란이 늘 뒤섞여 있고⋯ 판매/구매로 만나지 않았으면 훨씬 풍요로웠을 텐데.
e) 화폐가 있으면 자본과 착취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화폐를 교환 수단으로서의 화폐 기능에 제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맑스의 주장은 반대다. 화폐가 존재하고 상품의 교환이 일단 화폐를 통해 매개되면 M-C-M이 발생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화폐의 소유자들은 동일한 양의 화폐가 아니라 더 많은 양의 화폐로 끝나는 것을 목표로 교환 과정에 들어갈 것이다. 이 증가분은 어디서 오는가? 노동자들을 착취한 결과물에서 온다.
자본은 가치의 자기 확장이다. 그것은 피상적으로만 자기 확장인 자기 확장이다. 왜냐하면 가치의 실제적 확장은 노동자 착취를 통해 “생산이라는 숨겨진 거처”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f) 자본이 있으면 국가가 있다
자본은 국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 왜냐면, 상품 교환이 교환 과정 외부에 있는 별도 심급의 도량형의 확립과 규제 과정을 필요로 해서
- 왜냐면, 착취는 곧 계약(노동력의 매매)를 통해 매개되므로 이를 위한 별도 심급이 필요해서
국가는 자신을 재생산하기 위해 자신이 자본 축적을 촉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한다. 이 점에서 국가의 중립적인 외관은 단순히 외관일 뿐이다. 국가는 특수한 자본가들의 이익에 반하거나 실제로 자본가 조직들의 소망들에 반할 수 있지만, 전체로서의 자본 축적을 촉진한다는 이해관계 속에서만 그렇게 할 것이다.
희망에 대한 논의의 맥락에서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국가가 자본으로부터 특수화된다는 점 때문에 종종 그것이 희망의 소재지로 간주되곤 하기 때문이다. 특히 민주적 선거를 치르는 국가의 경우에 희망은 국가의 존재와 거의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희망은 선거의 기초이다. 다음번에는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 말이다. 그러나 국가가 자본 관계의 한 형태로서 실존하며 국가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총체성으로서 외피의 역할을 맡는다는 사실은 국가가 다른 형태의 사회로 가는 길을 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회를 위한 투쟁을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으로 보는 것은 어리석다. 이해할 수 있는 어리석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다.
국가는 자본 축적을 위해 가능한 가장 매력적인 조건을 제공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만약 이것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자본은 그냥 다른 곳으로 갈 것이다. 자본이 어떤 ‘국적’에 속한다는 개념은 거의 아무런 의미가 없다.
메모 : 인용문에 엄청 공감했다. 자본을 쌓는 자체를 그만두자는 말은 절대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아무도 정치인으로 뽑아주지 않을 것이고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도 그런 문장이 나온다. ‘대체 누가 가난에 찬성한단 말인가?’) 나 또한 그 말이 정치인의 몫이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기업에 대해서도 그런 생각을 종종 한다. 기업이 이윤 추구만 쫓는 대신 무슨무슨 윤리를 고려해야 한다는 말은 SNS에서 늘 튀어나오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기업 임원이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이윤 추구를 위해 그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이다.
g) 상품-가치-노동-화폐-정체성-자본-국가가 있으면 자연파괴-팬데믹-지구온난화-멸종이 있다.
줄여서, 상품이 있으면 멸종이 있다.
규제되지 않은 이윤 추구는 자본으로 하여금 인간 존재의 자연적 전제 조건을 파괴하도록 충동질한다.
자본은 파괴의 기차의 이름이다
왜 우리는 인종이나 가부장제가 아니라 자본이 우리가 직면한 파괴의 이름이라고 주장하는가?
- 우리가 살고 있는 상황의 무시무시한 긴급성을 강조하기 위해. 강도 높은 착취, 자연에 대한 파괴와 같은 동역학이 가부장제 개념에서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 자본의 개념이 위기의 개념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더 설명)
- 우리가 어떤 종류의 억압도 기반으로 하지 않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급진적 희망의 기초를 제공하는 통합적인 억압의 개념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 세상엔 온갖 정체성이 있고 (여성, 흑인, 청소년과 어린이, 퀴어⋯) 그에 따른 억압이 있는데 이것들을 하나로 묶는 몸이 자본이라는 주장을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가? → 탈정체성주의로 다시 돌아가기
확실히, 정체성의 언어는 그러한 정체화에 이의를 제기하는 데 사용될 수 있고 또 사용되고 있다. 나는 게이야, 그래서 뭐? 나는 여성이고 다른 여성들과 함께 남성이 우리에게 부과하는 한계에 도전할 것이다. 나는 흑인이다. 나는 버스에서 내가 선택하는 곳 아무 데나 앉을 것이다. 이 모든 경우에 억압에 대한 정체성주의적 반응이 있다. 그것은 억압의 한계에 도전한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정체성의 한계를 넘쳐흐르는 정체성주의적 반응이다. 각각의 경우에 위험은 그 반응이 더 이상 넘쳐흐르지 않고 새로운 정체성에 정착하거나 그러한 정체성을 부과하는 것이다.
정체화는 프로크루스테스적 끼워맞추기이다. 정체화된 인격은 어떤 상자에 억지로 끼워 맞춰진다. 정체성주의적 대응은 상자를 재정의하는 것으로, 예를 들어 여성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재정의하는 것으로 쉽게 끝날 수 있다. 반정체성주의적 반응은 어긋남이며 넘쳐흐름이다. 우리는 여성, 게이, 원주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상이다. 우리는 생성의 운동이기 때문에 그 어떤 범주에도 끼워 맞춰지지 않는다.
메모 : 정체성주의적 대응은 상자를 재정의하는 것으로 쉽게 끝날 수 있다는 말에 밑줄 쫙. 실제로 퀴어 논의에서 너무 자주 봤던 현상이라. 저는 이러이러한 성향이 있는데 이런 얘길 하면 사람들은 아무도 존중해주지 않아요, 라고 말을 하면 그렇군요 그건 퀴어 용어로 무슨무슨 성향이라고 해요 퀴어 월드에 오신 걸 환영해요 당신의 집 주소는 여기입니다 하고 대화가 끝나버리는 느낌. 사실 그 ‘퀴어’에 내가 속하는지 아닌지가 나를 결정짓냐 하면 그건 아닌데도. 그 안에서 이해받는 것으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실은 그 ‘퀴어’ 울타리조차 전혀 포용적이지 않아 나는 오늘도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글을 트위터에서 보고 왔는데도.
파괴 사슬의 연결고리는 그러면 어떻게 끊을 것인가? 접근 방식은 두 가지
만약 x면, 그러면 y이다; 만약 y면, 그러면 z다
에서그러면
을 절단하기그러면
의 힘이 너무 강한 경우 :만약 x면
,만약 y면
등등의 조건 자체를 조각내기
기존의 시도들
- 2002년 아르헨티나의 물물교환 운동. 수백만 명의 사람이 참가했는데 부분적으로는 화폐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부분적으로는 화폐의 힘에 대한 항의이자 대안적인 사회관계를 발전시키려는 시도. 그러나 여전히 상품 교환과 가치의 틀에 남아 있음. 그리고 시간이 흘러도 화폐의 발전 없이 물물교환이 효과적으로 기능하리라 생각하기는 어렵다.
- 소상품 생산자 사회에 대한 방어. ‘월마트 반대. 우리는 우리의 작은 상점들을 지키고 싶다.’ 하지만 이는 이윤을 끌어들이기 위해 점점 더 싸게 생산하고 분배하려는 자본의 끊임없는 충동과 대립한다.
- 도덕적 규범을 강제하기. 인권과 생태를 고려해서 결정을 내리도록 하는 입법.
민주주의에 대한 모든 반복적 강조는 이 둘(국가와 자본) 사이의 연결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혹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진술이며 민주주의에 대한 모든 환멸은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의 재확인이다. 이것들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치프라스에게 투표하세요,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에게 투표하세요, 샌더스에게 투표하세요, 코빈에게 투표하세요. 상황이 달라질 수 있으리라는 끊임없는 희망, 그리고 그것에 뒤따르는 반복되는 실망. (중략) 자신을 ‘좌파’라고 또는 ‘진보적’이라고 선언하는 정부는 경우에 따라 어느 정도 소득 재분배를 달성하거나 자본 약탈에 대해 어느 정도 제한을 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약속을 결코 이행하지 않으며 화폐의 지배에 진지하게 반대하는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이것은 개별 정치인이 특수하게 대의를 배신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일이 분명히 발생하긴 한다) 국가가 자본 축적을 촉진하는 것에 자신의 실존을 의존하기 때문이다.
메모 : 국가가 자본 축적을 촉진하는 것에 자신의 실존을 의존한다는 말에 밑줄 쫙. 그래서 나는 국가 규제를 통해 각종-자본주의-문제를 해결하자고 말하는 것도 흐름이 요상하다고 생각했다. 자본주의와의 싸움에서 국가는 절대 아군이 아닐 텐데⋯ 일부 정책에 의해 잠시 그래 보일 수는 있어도 본질적으로는⋯
만약 x면, 그러면 y이다
에서 그러면
을 절단하려고 시도하는 경우 → 만약 x라 해도, 반드시 y이지는 않다
고 말함으로써 출구를 찾아야 한다. 하지만 저자가 보기에 만약 x면
은 닫힌 정체성이다. 이것은 출발점으로 당연하게 여겨지는 어떤 것이다. x는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는 일종의 폐쇄다. 만약 상품이라면, 그러면 가치이다
에서 우리는 상품
을 열어야 한다. 상품 형태 너머에 존재하는 풍요를 기억하자. 상품 형태를 벗어버린 풍요와 상품 형태로 존재하는 부 사이에 맹렬한 적대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적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풍요는 상품 형태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다. 거기에는 어떤 넘쳐흐름, 어떤 어긋남이 있다. 객체는 잔여 없이는 개념에 끼워 맞춰지지 않는다. 하지만 상품 형태가 부의 지배적 형태이며 점점 더 지배적으로 되고 있다⋯. 상품은 풍요의 지배적 실존 형태이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상품 형태는 너무나 널리 퍼져 있어서 상품 형태를 완전히 벗어나 있는 풍요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어떠한 순수성도 없다. 풍요는 상품 형태 안에서 존재하지만 상품 형태에 대항하고-넘어서 존재한다.
전통적 맑스주의는 만약 x이면, 그러면 y이다. 만약 y이면, 그러면 z이다
의 문법을 취한다. 만약 상품이라면 그러면 ‘축적하라! 축적하라!’이다. 만약 ‘축적하라, 축적하라!’ 라면, 그러면 혁명적 노동계급의 형성이다. 희망은 혁명적 노동계급의 형성
에 있다. 그러나 『자본』이 쓰인 지 150년이 지난 지금 만약 x이면, 그러면 y이다
는 계속해서 끔찍해지며 맑스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쁜 길로 왔는데, z
는 여전히 오지 않았다. 우리는 z
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렸다. 역사는 우리의 주의를 체제가 가하는 긴장 쪽으로 돌리도록 밀친다. 그러나 희망은 반대 방향에, 즉 속박에서 벗어나기, 탈총체화에 있다.
우리의 활동을 노동으로 전환할 때 발생하는 두 가지 적대적 과정. 전통적 맑스주의는 2번에 초점을 둔다. 반면 이 책은 강조점을 1에 둔다.
- 우리의 일상 활동이나 행위를 노동(추상노동 또는 소외된 노동)으로, 즉 가치를 생산할 필요에 따라 규정되는 훈육된 활동으로 전환하는 것
- 자본으로 축적할 수 있는 잉여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이 노동을 착취하는 것
인간 활동을 노동으로 전환시키는 것의 적대는 이보다는 덜 가시적이다. 그것은 아침에 자명종과 싸우기, 아이들로 하여금 시계 시간을 받아들이도록 만들고 그들의 놀이를 숙제 의무에 종속시키도록 만들기 위한 수년 동안의 교육, 화폐 부족에서 유래하는 빈곤 등으로 나타난다. 이 적대는 쉽게 지각되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 덜 실재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메모 : 아이들로 하여금 시계 시간을 받아들이도록 만들고 그들의 놀이를 숙제 의무에 종속시키도록 만들기 위한 수년 동안의 교육 → 이 파트에서 각종 정신 아픔이 친구들을 생각했다. ADHD, 우울증, 조울증, 양극성 장애, 기타 등등의 사유로 사회가 규율로 주입하는 성실성 기준을 통과할 수 없었던 친구들. 사회가 기대하는 ‘정해진 시간에 출근해서 8시간동안 일인분의 일을 하고 정해진 시간에 퇴근할 수 있는 정신과 육체’라는 프로크루스테스의 틀에 도무지 맞지 않아 오늘도 어딘가에서 욕을 먹고 어딘가에서 잘리고 어딘가에서 사과를 하고 왔을 친구들이⋯.
책 『저항은 휴식이다』도 생각났다. 그 책에서는 아예 우리의 신체가 본래부터 노동하기 위한 신체가 아니라고 말한다. 휴식을 하십시오. 휴식은 그 자체로 곧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 되리니.
마찬가지로, 계급투쟁의 두 가지 수준. (이 경계가 항상 명확한 것은 아니지만 노동의 문맥에 속하는 투쟁과 노동에 대항하는 투쟁 사이의 구분은 여전히 중요하다.)
- 자본가계급에 대한 노동계급의 투쟁. 계급화의 투쟁. 우리를 계급 속으로 밀어넣는 투쟁. 가치 생산의 과정도 계급투쟁이다. 자본에 대한 노동의 투쟁은 이미 노동으로 구성된
세계 안에서의
투쟁이다. - 계급화되는 것에 대항하는 투쟁. 우리의 투쟁은 노동에
대항한다
.세계의 구성에 대한
투쟁.
6. 희망을 생각하라, 위기를 생각하라
희망을 생각하려면 위기를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이성적 희망의 핵심이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노동계급이 공산주의를 만들어 가는 중이라는 블로흐의 배후 가정을 공유할 수 없기 때문에 희망의 합리적 근거에 대한 질문에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중략) “위기가 오면 그때가 바로 혁명의 시간이다!”라는 옛 생각은 결코 분명하지 않다. 1930년대의 위기는 오히려 파시즘과 전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희망은 단순화에 빠지지 않으면서 우리를 위기에 대한 질문으로 인도해야 한다.
풍요가 상품의 잠재적이고 적대적이며 반정체성적인 이면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그것을 상품 형태의 위기로 이해해야 한다. 첫째로 우리는 상품의 핵심은 가치이고 가치는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을 줄이려는 끊임없는 충동이라고 주장했다. 둘째로 우리는 이러한 충동이 자기결정을 향한 추동력으로 이해되는 기존 생활 방식의 풍요와 끊임없이 충돌한다고 주장했다. 셋째로, 우리는 이 갈등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상승효과를 상쇄하는 데 필요한 착취율의 증가를 제지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넷째로, 우리는 그것의 결과가 이윤율의 하락 경향이라고 주장했다.
일단 우리가 자본을 공격으로 본다면 전통적인 구분들이 문제로 된다. 자본은 공격적-진보적이다. 우리의 반응은 보수적이고 반란적이다. 자본은 보수적이고 반동적이며 반자본주의는 진보적이라는 기존의 관념은 맞지 않다. 그것이 오늘날 세계 여러 지역에서 이른바 “좌파”를 가로지르는 큰 분할선이다. 오늘날 제공되고 있는 유일한 “진보”는 자본주의적 진보이며 이것은 사람들의 삶의 풍요에 대한 공격이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는 좋지 않아. 우리 아이들은 뉴욕으로 이주해야 해.”라는 보다 비판적인 반응은 역설적이게도 자본을 선호할 수 있다. 공동체의 낭만화와 친자본주의적 진보주의 사이에는 딜레마가 있다. 그리고 유일한 탈출구는 “그래, 우리 공동체에는 엄청난 풍요가 있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아. 우리가 있는 곳에서 시작해서 우리의 풍요롤 발전시키기 위해, 그러나 우리가 결정하는 방식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싸워야 해.”이다.
메모 : 자본은 보수적이고 반자본주의가 진보적이라는 기존의 관념은 맞지 않다는 말에 박수 짝짝. 왜냐면 반자본주의의 첫 시작은 대체로 ‘저는 AI 쓰기 싫어요’나 ‘저는 스마트폰 쓰기 싫어요’나, 아무튼 요즘 사회에서 권장하는 트렌드에 나는 따라가기 싫다는 발화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저는 기계 쓰기 싫고 아날로그가 좋아요. 저는 이대로가 좋아요. 그건 틀림없이 보수적인 반응인데,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 보수적인 사람인데 왜 내 가치관은 전부 진보 키워드가 달려 있는지 딜레마에 빠졌던 적이 많아서 이 뒤집기가 흥미로웠다.
메모 : 이 책은 8장까지 있고 요약은 현재 6장까지 했는데, 마지막 8장은 결론 및 요약이라 크게 가져올 내용은 없고 문제는 7장이다. 7장 제목 : 지연된 위기. 읽기는 다 읽었으나 솔직히 텍스트가 공중에 둥둥 떠다니고 이해를 거의 못했다.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에 대한 독해와 비판이 주된 내용인데 아무래도 해당 영역에 대한 아무런 배경 지식 없이 읽는 건 6장까지가 아닌가 싶다. 뭔가 재밌는 얘기를 했겠지만! 저는 모르겠더라구요!
그래서 이 글은 여기까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