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국제도서전 후기
6/18 - 6/19 서울국제도서전에 다녀왔고 열두 권의 책을 샀다.
구매 목록
- 비극, 테리 이글턴, 을유문화사
- 얼마 전에 읽었던 『폭풍 다음에 불』에 이글턴에 대한 언급이 있었고, 을유문화사 부스에 마침 이글턴의 책이 보였고, 샀고, 어제부터 아주 재밌게 읽고 있다.
- 쇼스타코비치는 어떻게 내 정신을 바꾸었는가, 스티븐 존슨, 풍월당
- 클래식 음악에 대한 책을 도서전 올 때마다 하나씩 집게 되는데 이번엔 이거였다. 몇 페이지 읽어봤는데 재밌어 보였고 쇼스타코비치 개인적으로 좀 궁금했다. 간 김에 풍월당 시디도 하나 샀다.
- 노인력, 아카세가와 겐페이, 안그라픽스
- 책 표지 뒷면에 소개 겸 인용 문구로 ‘건망증 이즈 뷰티풀’이 써 있었음. 건망증이 어떻게 뷰티풀한지 알아보고 싶어서 구매했다. 진짜다.
- 스카팽의 간계, 몰리에르, 사소서사
- 관심 있는 문학 장르 : 희곡 및 비극, 관심 있는 시대 : 중세 및 근세인 사람으로서 몰리에르 희곡을 언젠가는 읽어봐야 한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 표지가 예뻤다. 참고로 몰리에르는 17세기 프랑스의 극작가.
- 『스카팽의 간계』를 살지 『사랑과 전쟁』을 살지 고민돼서 사장님께 뭐를 더 추천하시냐고 여쭤봤는데 하나를 콕 집어주지 않으셨다 ㅎㅎ 전자가 좀 더 대표작으로 이름이 알려진 걸로 알아서 결국 전자 픽.
- 모모모모모, 밤코, 그림책향
- 이 그림책 진짜 귀엽다. 타이포그래피를 활용한 그림책이 이렇게나 웃기고 귀여울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첫날 한번 슥 펼쳐보고 지나갔던 건데 임팩트가 잊혀지지 않아서 둘쨋날에 부스 위치 메모해 놨다가 찾아가서 구매했다. 모모모모모. 내기내기내기.
- 다클리 - 미국 고딕의 검은 영혼, 릴라 테일러, 구픽
- 머리에 힘주지 않으면 책을 쓸어담게 되는 출판사를 나는 위험한 출판사라고 부른다. 구픽은 약간 위험한 출판사다. 장르문학과 그 비평에 대한 책을 내시는데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 『순정만화에서 SF의 계보를 찾다』, 『책에 갇히다』가 한때 우리집 책장에 있었고 그 중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은 지금도 있다. 심지어 부동산 문제로 한번 팔았다가 다시 샀다 (⋯) 마크 피셔 짱.
- 『다클리』는 미국 고딕 장르에 대한 비평서 같은데, 사실 미국 고딕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른다. 영화 『씨너스』도 아직 안 봤다. 하지만 지금부터 알아가면 되는 거 아닐까요? 잘 부탁드립니다.
- 출판사의 첫 책, 송현정 인터뷰집, 출판사 핌
- 이제 여기도 장르명 하나 붙여줘야 한다. 책읽기에 대한 책, 글쓰기에 대한 책, 책방에 대한 책, 책 편집과 출판에 대한 책⋯. 이런 책은 정말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신중을 기해 골라야 한다. 그중에서 고른 게 일 년 미만 신진 출판사들의 첫 책 제작기인 요 책.
- 다들 뭐에 가장 신경 쓰며 첫 책을 만드시려나. 순수한 궁금증으로 샀다.
- 활자 안에서 유영하기, 김겨울, 초록비
- 매대에 익숙한 표지와 익숙한 저자명이 보이길래 와 겨울님 책이다~ 하면서 펼쳤는데 친필 사인본이었다. 사인회가 있다는 말은 들은 적 없는데 알고 보니 우리 오기 십 분 전에 겨울님이 왔다 가셨단다. 헉 그렇다면 돌아다니다가 마주칠 수도 있는 걸까⋯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이것도 사실 ‘책에 대한 책’이라 평소라면 안 샀을 수 있는데 (이런 책이 정말 너무너무 많다 이거 다 사면 저 파산해요) 친필 사인본은 놓칠 수 없었다.
- 망설이는 사랑 - 케이팝 아이돌 논란과 매혹의 공론장, 안희제, 오월의봄
- 오월의봄은 위험한 출판사다. 위험한 출판사의 정의는 위에서 설명했으니까 패스. 현재 우리 집에 있는 오월의봄 책 : 『짐을 끄는 짐승들』,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 『퀴어돌로지』, 『알페스x퀴어』. 그 외에 완독한 책 : 『가족을 구성할 권리』, 『존버씨의 죽음』.
- 트위터 친구들이 잊을 만하면 추천하는 『감정의 문화정치』나 『반란의 매춘부』도 궁금하긴 했는데 ‘세상에 이런 책이 있었어? 이건 절대 사야지’ 하고 한방에 고르게 되는 건 역시 케이팝 아이돌 ‘논란’ 컬쳐에 대한 비평서였다.
- 그리고 내가 매대에서 저 책 집어드니까 친구가 어어 너 그 책 집을 거 같더라 했다. 잉 그렇게 예상 가능한 사람이고 싶지 않아요⋯. 그치만⋯.
- 성스러운 동물성애자, 하마노 지히로, 연립서가
- 처음 봤을 때 약간 당황스러웠다. 출판사 매대에 놓여 있던 다른 책들은 전혀 이런 결(?)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동물성애에 대한 책이면 사회적 금기 중 하나를 다루는 셈인데 그럼 출판사 자체가 이런 불온한 섹슈얼리티나 소수자 관련 책을 내는 곳인가? 하고 보면 옆에 놓인 다른 책은 새우 그림이 그려진 역사서와 서경식 작가의 에세이집이고⋯ 뭐하는 곳이지? 이게 뭐예요? ㅋㅋ
- 아무튼 찐으로 동물성애에 대한 책이라니 너무 궁금하니까 꼭 사야 했다. 그리고 지금 절반 정도 읽었는데 정말 재밌다. 재밌고⋯ 이걸 어떻게 남겨야 ‘이거 순 미친 새끼 아니야’ 같은 악플을 안 받고 책 리뷰를 쓸 수 있을까 고민은 좀 된다. 불온한 섹슈얼리티에 대한 책은 이제 정말 읽을 만큼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에요.
- 낯선 환호들 - 각설이 품바와 낮은 곳의 목소리, 윤결, 히스테리안
- 재작년 도서전에서 샀던 『뒷전의 이야기』가 완전히 새로운 흥미의 지평선을 열어줘서 그 뒤로 무속 신앙, 민중 문화 같은 키워드가 있으면 일단 책을 펼치고 본다. 특히 ‘낮은 곳의 목소리’를 듣는 데 집중했던 문화라면 더더욱. 이 책도 그렇게 펼쳤고 아주 재밌어 보였다.
- 지은이는 윤결 한 사람이지만 책이 뭔가 특이한 포맷으로 되어 있어서 다른 사람의 글도 실려 있는 거 같은데, 그 중 김화용이라는 이름이 눈에 띄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했던 『집에 살던 새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의 감독이기도 하고 최근에 아주 인상 깊게 읽었던 『제로의 책』의 공저자 중 한 명이기도 하셔서 이게 이렇게 이어지나? 도 약간 호기심 포인트.
- 강철왕국 프로이센, 크리스토퍼 클라크, 마티
- 마티도 참 위험한 출판사다. 현재 집에 있는 건 『다른 방식으로 듣기』 하나뿐이지만 그게 얼마나 위험한 한 권인지. 책의 내용뿐 아니라 물성까지 합해 이렇게 완벽한 디자인이 있나 싶을 정도로 만족스러웠던 책이라 정말 무ㅅㅅ서운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참고로 집에는 없지만 완독한 목록은 『마이너 필링스』, 『사랑에 따라온 의혹들』, 그리고 한때 우리 집에 있었던 『감정, 이미지, 수사로 읽는 클래식』.
- 이번 도서전 구매 목록 중 최고 벽돌책. 1000페이지가 넘고 가격은 4만 5천원이었다. 이 책 산다고 하니까 마티 스탭 분이 ‘귀인이시네요⋯.’ 하고 박수 쳐주심 ㅠㅠ
- 철저한 마차살 드리븐 구매다. 마차살의 배경이 19세기 독일이라 호엔촐레른 성을 달고 있는 프로이센 황족 캐릭터도 나오고 안할트 대공자에 바이에른 왕세자도 나오시기 때문에 이런 책이 있으면 도움이 꽤 될 거 같았다. 애초에 마차살 연재하시는 작가님이 이 시기를 고른 게 나치에 대한 고찰을 다시 해보고 싶어서 (왜 우리는 나치 독일이 끔찍한 죄를 저질렀음을 알면서도 그 근원으로부터 다시 수많은 문제가 반복되게끔 하는가?) 라는 답변도 있었고 『강철왕국 프로이센』 역시 프로이센을 ‘비스마르크와 히틀러를 연결하고, 독일제국에서 나치의 제3제국으로 나아가는’ 경유지로 인식한 상태에서 쓰인 책 같으니 더더욱⋯.
소회
- 입장할 때 콘푸로스트 바를 하나씩 나눠주더라. 그러니까 이게 코엑스에서 하는 락페나 다름없음을 주최도 인정한 게 아닐까 싶던데⋯. 인파가 워낙 많기도 하고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힘이 부치고) 중간에 배고파서 점심 먹으러 나가면 가장 줄이 없어야 할 거 같은 노브랜드 버거마저 저 멀리 웨이팅 줄이 보이는 행사라 개인적으로는 콘푸로스트 바 하나씩 더 줘야 하지 않나 싶었다.
- 매년 도서전 시기만 되면 튀어나오는 반응들, ‘솔직히 도서전에서 책 사는 것보다 집에서 알라딘으로 주문하는 게 더 편하고 이득이에요’도 이제 지겹고 거기에 반작용처럼 따라오는 ‘하지만 유통 마진 문제도 있고⋯ 이렇게 독자와 만나는 공간이 얼마나 소중한데요’ 도 그리 마음에 차진 않는다. 전자처럼 시비를 걸면 후자로 방어할 수밖에 없어서 후자의 말을 하게 되는 것이지, 후자가 제시하는 방향이 도서전에 참여하는 모두가 슬로건처럼 내걸고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이라곤 생각되진 않는다. 일단 저는 도서전에서 부스 참가자와 소비자가 그리 유의미한 만남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럴 여유가 있어야 말이지 인파가 이렇게 많은데⋯.
- 전시도 굿즈도 관심 없고, 강연 들을 거 아니고 대형 부스 갈 거 아니고, 굳이 매대를 훑어봐야만 내 취향을 아는 것도 아니고 내가 좋아하는 출판사 목록도 알만큼 아는데 매번 이 인파를 감당하며 ‘코엑스’를 가야 하는 것인가?는 이제 진짜로 회의적이긴 하다. 재밌는 책 목록은 알라딘에서 관심 있는 출판사들의 신간 출간 알림을 켜놓고 받을 수도 있고 날 잡고 좋은 출판사 디깅을 해 볼 수도 있고 친구 집단을 잘 꾸려서 큐레이션을 받아먹을 수도 있고(?) 반드시 그 코엑스 메인 홀의 치사량의 인간에 치여봐야 알 수 있는 건 아닌데 왜 이렇게 피곤을 감수해야 하는 행사가 됐을까? 나는 그래도 나 하나의 피곤만 감당하면 되지, 아이를 동반한 가족은 대체 어떻게 아이를 케어해야 하는 걸까? 거동이 불편한 사람도 여유를 갖고 책을 둘러볼 수 있는 행사는 만들 수 없나?
- 장이 좀 덜 중앙집권화되었으면 좋겠다. 자꾸 락페 생각을 하게 되는데 (하는 시기도 비슷하고 며칠씩 한다는 점도 비슷하고 체력을 크게 소진한다는 점도 이젠 비슷하다) 락페도 인천에서 하는 펜타포트 있고 부산락페 있고 지산 있는 것처럼 (지산 요즘은 없나요?) 책 행사도 좀.. 특색 있는 여러 개의 군립체가 되면 좋겠다. 코엑스 물가 너무 비싸다. 이럴 거면 도시락 싸와서 먹을 수 있게 홀 앞에 피크닉 매트 깔아줘.
- 아무튼 국제도서전은 올해가 정말 마지막이 될 거 같고. 내년부터는 저도 지역 북페어를 알아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