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분노-희망-풍요

기차를 멈춰라, 기차를 멈춰라, 기차를 멈춰라!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희망이 필요한 시기다.

우리에게서 시작하자. 우리를 가두는 울타리에서부터가 아니라 그 울타리를 부술 수 있는 힘, 우리의 풍요에서 시작하자. 무엇을? 이 책을. 저항과 반란의 춤을.

아니 오히려 적대에서 시작하자. 투쟁의 기쁨. 분노 → 기쁨

우리의 풍요, 우리의 절대적 생성 운동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비명을 지르고 있다. 그것은 덫에 걸려들어 그 덫을 빠져나오려고 비명을 지르고 있다. 그것은 덫에 걸렸지만 그 덫에서 넘쳐흐르고 있다. 그것은 저항-풍요, 대항하고-넘어서는 풍요이다.

그러므로 순수한 풍요에서 시작하지 말자. 왜냐하면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항-풍요에서, 투쟁하는 풍요에서, 적대에서 시작하자. 풍요와 그것을 빈곤하게 만드는 세상 사이의 적대에서, 풍요와 화폐 사이의 적대에서 시작하자.

지배에서 시작하지 말고 그 지배에 대한 거부-저항-반란에서 시작하자. “자본주의는 얼마나 끔찍한가, 하지만 언젠가는 혁명이 올 것이다”라고 우리에게 말하는 위대한 좌파 전통과 단절하자. 그 언젠가는 점점 멀어져만 간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단어는 그 문장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마침내 우리에게는 “자본주의는 얼마나 끔찍한가”라는 문장만 남게 된다.

희망에서 시작하자. 점점 괴로워지는 희망. 두려움으로 물든 희망. 불가능해 보이는 희망. 어떠한 확실성도 없는 희망.

2. 우리는 희망을 다시 배워야 한다

에른스트 블로흐 :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Es kommt darauf an, das Hoffen zu lernen 영어로 느슨하게 번역하면 It is time to learn hope. 아우슈비츠 이후로 시를 쓰는 게 불가능해진 테오도르 아도르노와는 다른 행보..처럼 보이지만 사실 둘은 그렇게 모순되지 않는다

“아직 아님”(Not Yet)의 현재적 실존

블로흐의 희망론은 공산주의가 무너지기 전에 세워진 것. 공산주의에 대한 희망이 남아 있던 시절. 다른 형태의 사회 조직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유지하지 못하는 오늘날에는 블로흐의 희망론을 그대로 가져오기 힘들다. 희망을 더 꿈꾸기 어려워진 시대.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다시 희망을 배워야 할 때다

희망을 생각하는 것. 독타 스페스(Dotca spes) ↔ 소망적 사고

  • 소망적 사고란? “이러이러한 이상적인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소망적 사고는 세상을 바꾸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반대로 그것은 질식사시킨다.
  • 소망적 사고를 물리치는 법

    한 가지 대답은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이길 것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현존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투쟁한다. 우리를 비인간화하는 체제에 맞서 절규하는 것은 어떤 정당화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우리의 인간성이라고 이해하는 것의 표현일 뿐이다.

메모 : 유시민이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이유로 이기적 이타심을 언급했던 이 영상 생각이 났다. 이기는 게 목표였던 사람들은 결국 끝에 가선 변절한다는 얘기도 종종 들리지⋯.

그러나! 우리가 성공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블로흐 ‘희망은 실패보다는 성공을 사랑한다’ 이걸 잘못 해석해서 수단을 정당화하는 도구주의로 쓰면 안 되지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성공을 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로흐는 옳다. 희망은 우리를 모종의 실현, 모종의 성공으로 향하게 한다. 우리는 존엄하게 죽는 것 이상을 행하기를 원한다. (중략) 반란적인 딸인 이 책은 가만히 있질 못하고 “그래, 그래, 존엄이다, 존엄! 하지만 우리는 더 나아가야 하고, 희망이 필요하고, 이기고 싶다! 우리는 이기고 싶다. 비록 이기는 것이 무엇인지는 그것을 달성하는 과정에서만 명확해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지만 말이다.” 라고 말한다. 희망은 존엄에 기초하지만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희망은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존엄이다.

메모 : 책 『자본주의 리얼리즘』 에서도 비슷한 언급이 있다.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느껴지도록 만든다. 반자본주의적 문화도 자본주의 안으로, ‘우리는 세상을 향해 반항한다’는 메세지를 전파하는 듯한 모양새를 통해 더없이 자본주의 친화적인 형태로 녹여 넣는다. 혁명과 반란을 꿈꾸는 건 즐겁다. 하지만 진실로 혁명과 반란이 가능하리라고 믿고 그 실현 가능성을 따지는 일은 얼토당토않게 느껴진다. 앞이 보이지 않아 절망적이다⋯. 하지만 이 책은 이렇게 반자본주의에 대한 희망을 우리의 현실과 유리해서 ‘언젠가 이뤘으면 좋겠지만 아마 이루지 못할 것’으로 상상하는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안에서-대항하고-넘어서가 끊임없이 강조된다.

희망은 정체성을 넘어서 나아간다. 정체성은 우리를 가둔다.

그것은 우리를 항상 정체성주의적 사고와 행동 방식으로 끌어들이는 매우 강력한 저류이다. “우리는 흑인이다”는 흑인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백인의 정의에 대한 항의에서, 따라서 일종의 넘쳐흐름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그것은 흑인 피부를 가진 사람이 무엇인지에 대한 재정의에 쉽게 가두어질 수 있다. 이것은 원주민, 여성,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피식민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이야기될 수 있다.

반정체성주의적 접근 방식은 정의된 집단들이 아니라 사회적 적대의 흐름(및 넘쳐흐름)을 기반으로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사람들을 그들의 위치나 역할 또는 관심의 관점에서 보는 전통적인 사회학과는 대립하는 것으로, 반사회학적이다. 이러한 집단이나 역할이나 이해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적대적 흐름을 방해하고 가둔다는 것이다.

메모 : 『워크는 좌파가 아니다』 에서 나왔던 워크에 대한 비판과도 결이 비슷하게 느껴진다. 해당 책에서 워크는 이를테면 ‘흑인 여성 시인의 시는 반드시 흑인 여성 번역가가 번역해야 하고 안 그러면 작가의 정체성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로 이해하는 사람들을 가리켰고 해당 책의 주장은 ‘그런 사람들은 길을 잘못 들고 있는 것이며, 좌파가 진정으로 향해야 할 길은 정체성주의가 아니라 보편주의’라는 거였는데.. 동의가 가는 부분이 분명 있었다.

내가 맞닥뜨린 혼란, 나와 사회 사이의 요철을 설명하기 위해 정체성의 단어가 필요한 시기는 있다. 여성, 퀴어, 페미니즘, 서브컬처, 불안장애, 정신병⋯ 그런 키워드들이 마련되어 있어서 초반의 나를 잘 정리할 수 있었고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지금의 내가 있지만, 동시에 그런 단어들이 단지 주어진 범주를 넓히기만 할 뿐 근본적인 변화는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도 오랫동안 해 왔다.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무성애라는 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요’를 얼마나 더 설명해야 무성애 가시화라는 목표를 이룰 수 있는 것일까? 무성애가 무엇인지, 트랜스젠더가 무엇인지 설득하고 ‘이해’받는 게 그렇게나 중요한 목표였을까?

『마차살』에 나왔던 ‘이해는 가외다. 존중이 앞선다.’도 생각났다. “이해하기 때문에 존중하는 것만큼이나 파괴적인 것이 없다.” 다시 생각해도 맞는 말이야.

당신을 어떤 대명사로 지칭할지를 바꾸어내는 것이 마치 대단한 급진적 변화처럼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목에 핏대를 세우며 대명사 사용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야말로 그것 말고는 달리 변화시킬 힘이 없다는 사람들의 두려움이 표현되고 있는 현상이다. 나는 우리가 더 많은 것을 희망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 논리는 단순하다. 만약 희망을 갖지 않는다면,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힘 있게 행동할 수가 없다. 그리고 우리가 행동할 수 없다면, 종말론자들의 모든 예언이 현실이 될 것이다. (『워크는 좌파가 아니다』)

어떻게 적대에 집중할 수 있을까?

루카치 : 적대는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 우리 모두를 관통하는 것

우리의 희망은 부재가 아니라 절규에서 시작된다. 희망은 필연적으로 적대적이다. 우리는 존재하는 것에 맞서 생각하고 희망한다. 정체성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희망-사고는 필연적으로 반정체성주의적이다.

‘자본주의를 없애고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현할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 주체와 객체에 대해 생각하는 것. 희망은 객체에 대항하는 주체의 운동이다. 우리가 대항하는 것은 객체. 우리는 우리가 반란하는 객체가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주체와 객체 사이에는 상호 적대도 있지만 상호 침투도 있다. 우리는 자본에 의해 침투된다. 우리는 손상된 주체이다. 우리는 순수한 혁명적 주체가 아니다. 그러나 반대도 마찬가지다. 자본이 우리에게 침투하여 우리를 약하게 만든다면 반대로 우리가 자본에 침투하여 그것을 약하게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메모 : 손상된 주체라는 표현에 밑줄 백 번쯤 긋고 싶다. 탈자본주의를 지향하고 비건을 지향하지만 나는 완벽하게 탈자본주의를 할 수도 완벽하게 비건이 될 수도 없다. 매일 조금씩 노력하고 매일 크게 실패한다. 매일매일. 그런 실패를 갖고 나 자신을 크게 비난하지도 않지만, 이만하면 애썼다고 스스로를 격려하는 것 역시 내가 생각했을 땐 도무지 정답이 아니어서, 손상된 주체라는 말이 그저 적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순수한 혁명적 주체가 아니고, 그게 목표도 아니다.

주체를 낭만화하거나 본질화하는 것, 주체를 그것을 관통하는 객체와 분리하여 다루는 것은 그 주체가 노동계급, 원주민, 여성, 흑인 등 그 어느 것으로 이해되든 상관없이 환멸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메모 : 최근에 이런 트윗을 봤다. ‘우리 회사 여자 이사님 거의 부사장 직전이었는데 퇴사 사유가 딸이 아기를 낳아서 돌봐줘야 해서였다. 지금은 애가 많이 커서 마트 캐셔 파트타임을 한다고 들었는데 세상에 그 인재가⋯.’ 그 트윗은 꽤 많이 리트윗되었고 나는 그 트윗이 아주 모욕적이라고 생각했다. 모욕적이라고 생각했던 이유 대보라면 커피 한 잔 놓고 족히 한 시간은 얘기할 수 있는데, 어쨌건 가장 마지막에 들었던 의문은 ‘왜 사람들은 이것 또한 대상화라는 걸 인지하지 못할까’였다. 성적 대상화만 대상화인가. 이것 또한 한 개인의 삶을 와플팬에 넣고 눌러버린 수준의 대상화인데.

부정적인 사고를 넘어서 : 안에서-대항하고-넘어서 사고하기.

  1. 우리는 자본주의 안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이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가 자본주의에 반작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싫든 좋든.. 이것은 안에서와 대항하고 사이의 하이픈으로 표현된다. 하이픈은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를 의식적 선택으로 보는 관점을 비판한다. 특별한 혁명가들과 평범한 시민이 나뉘어져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반란적이다. ’대항하고’로부터 ‘안에서’를 분리하는 것은 곧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 넘쳐흐르는 것에 한계를 부여하는 것이다. (‘혁명가’도 일종의 정체성처럼 작용한다)
  2. ‘대항하고’와 ‘넘어서’ 사이의 하이픈도 마찬가지. 이 둘을 분리하는 것은 우리를 도구적 방향이나 유토피아적 방향 중에서 어느 한쪽으로 이끈다. ‘우리는 먼저 권력을 장악하고 그다음에 다른 세상을 만들 것이다’ 또는 ‘우리는 먼저 대항하고, 그리고 나서 그 너머에 대해 걱정할 것이다’ 이 분리의 문제점은 ‘넘어서’가 영원히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토피아적 방향으로 향할 경우 희망은 시간 -> 공간의 이동을 거친다. 묵시론적 사상에서 유토피아란 미래에 오는 것, 싸워서 쟁취해야 할 것, 적어도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유토피아적 사상에선 지금 여기와 다른 공간, 꿈꾸거나 찾아야 할 어떤 것, 다른 세계에 대한 추구가 된다.

메모 : 컨텐츠 시장을 완전히 장악해 버린 회빙환(회귀/빙의/환생)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싸워서 쟁취하는 미래를 우리는 정말이지 상상하지 못하는 듯.

분리는 정체성주의적이며 분리된 정체성을 만든다. 결집은 반정체성주의적이다.

3. 역사성

화폐와 국가의 존재. 그것들이 너무나 영구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것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조차 어리석어 보인다. 하지만 그것들이 항상 거기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화폐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조직하는 역사적으로 특유한 형태이다. 그것은 늘 존재했던 것은 아니며 앞으로 늘 존재할 거라고 생각할 이유도 없다.

사회적 관계가 물신화되거나 사물화되는 것이 자본주의의 특징이다.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사물들 사이의 관계로 보이게 된다. 내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노트북을 샀을 때, 나는 교수로서의 나의 활동과 이 컴퓨터를 설계하고 제작한 사람들의 행동 사이에 어떤 관계를 수립한다. 하지만 그 관계는 그 자체로서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두 가지 사물 사이의 관계로 나타난다. 요컨대 그것은 나의 화폐와 내가 구매한 기계 사이의 관계로 나타난다. 상품 교환은 제작이나 행위의 활동을 시야에서 가린다. 한편에서 나는 구매자로만 나타난다. 거기에는 가르치거나 연구하기 같은 활동의 표식이 전혀 없다. 내가 그것들을 대가로 봉급을 받았고 그 봉급이 나로 하여금 기계를 살 수 있게 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 나타나는 유일한 사람은 상점의 판매자이다. 디자이너나 그것을 제조한 사람들의 표식은 없다.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가? 이런 것들을 누가 아는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활동은 단순히 사물들의 교환이라는 형태 속에만 존재한다. 주체성은 사라지고 주체는 객체로 대체된다.

메모 : 이 단락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역시 2차 창작 동인 행사. 판매자로 처음 나갔던 동인 행사에서 사실 조금 충격을 받았었다. 당시 내가 판매하는 책과 무료 나눔하는 굿즈가 있었는데, 당연히 내 책은 사지 않고 나눔 굿즈만 가져가시는 분들이 있다. 그건 전혀 상관 없었다. 그런데 그 중에 종종 나와 눈도 안 마주치고 아이템 줍듯이 그걸 가져가는 분들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 행사장이 거대한 게임 맵이고 그분들이 플레이어라면 나는 길 중간에 서 있는 NPC가 된 느낌? 나눔 굿즈를 가져가는 사람과 나 사이에 어떠한 인간적 교류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게 충격이었다. 그건 사실 내 책을 팔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사람은 나에게 돈을 줬고, 나는 책을 팔았고, 그러니까 우리 사이에 주고받을 건 다 주고받았다고 여겨지는⋯ 그 느낌이 왜 그렇게 생경하던지.

나는 수익 창출을 목적으로 행사에 나간 게 아니었다. 적어도 그날 갖고 간 내 물품들은 내 애정의 결과였고, 책을 공짜로 주는 한이 있어도 ‘이 책에 찰나의 관심을 갖게 된 그 사람의 애정’에 대해 듣거나 교류하고픈 욕심이 있었지 자본주의 시장에서 ‘싸다 싸 이 모든 게 삼만구천팔백원’을 외치고 싶었던 건 아니라고⋯ 정제되지 않은 언어로 오랫동안 생각했었다. 인기 부스와 비인기 부스의 차이가 눈에 보이는 것도 사실 한몫했다. 더 예쁜 그림, 예쁜 굿즈, 도파민 휘몰아치게 글 잘 쓰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나⋯를 내가 왜 비교해야 하는 거야? 근데 그런 비교를 하게끔 만든다니까 판매-구매라는 시스템이.

메모2 : 얼마 전 친구가 하는 농장의 플리마켓에 다녀왔던 것도 생각났다. 나는 그날 꽤 알찬 쇼핑을 했는데 막상 물건을 주시는 분들이 자꾸 공짜로 주려고 하셔서 당황했었다. 저는 물건을 사러 온 건데 왜 자꾸 공짜로 주신다고 하는 거예요⋯! 앞으로 계속 만날 사이면 모를까 일회성 만남인데 빚을 지고 간다는 느낌을 받기 싫어서 아 아뇨 돈을 내게 해 주세요 하고 삐걱삐걱 하다 돌아왔는데, 돌아오는 길에 느꼈던 약간의 이물감과 이 책을 읽으며 느낀 인상을 합쳐 보자면, 물물교환을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거 같다. 물론 난 준비된 게 하나도 없었지만. 화폐 없이 오로지 물물교환으로만 기능하는 장터를 만들면 일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메모3 : 사실 그런 장터가 2차 창작 동인계에는 있다. 동인지를 만드는 사람들만이 모여 서로의 동인지를 교환하고 끝내는 행사를 ‘교류전’이라고 부르는데, 열릴 때마다 소비자들의 슬픔과 원성이 하늘을 찌른다. 대체 왜 돈을 내고 사지 못하게 만드느냐. 글 쓸 줄 모르고 그림 그릴 줄 모르는 사람은 그럼 어떡하란 말이냐 나도 갖고 싶다 나도 이 장르를 이렇게나 사랑하는데⋯. 그러니까 문제가 참 복잡하다. 어쩌면 창작자-소비자라는, ‘정체성’으로 구분되는 이 구도 자체가 잘못됐는지도 몰라.

활동적 주체가 배제되면 희망하는 사람도 희망되는 사물에서 제거된다. 그것은 세상을 바꾸기 위한 능동적인 노력의 일부가 아니라 수동적인 소망이 된다.

전통적 관점 : 이러한 (화폐라는) 형태가 인간 활동을 실질적으로 가두었기 때문에 이것은 오로지 혁명에 의해서만 극복된다. 혁명이 미래에 확고하게 자리 잡을 때까지는 가치가 지배하고 화폐가 지배하며 자본이 지배한다 이 책이 제시하는 대안적 관점 : 형태가 항상 쟁점이 되고 있다. 형태는 항상 반대에 부딪치고 있다. 국가, 자본은 우리의 활동을 특정한 논리 안에 담으려는 일련의 과정의 일부이지만, 이 가두려는 투쟁은 삶의 흐름을 완전히 가두는데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

역사성은 역사적 유물론을 의미하지 않는다. 역사적 유물론이란? ‘자본주의는 끔찍하지만 필연적으로 거처야 할 과정 중 일부다, 지나가는 터널로서의 진보다’ 그러므로 터널 끝에 있는 약속의 땅에 도달하기 위해 과정은 모두 정당화될 수 있다는 주장 -> 따라서 역사적 유물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것에 저항하는 반자본주의를 반진보로 보곤 한다. (ex. 그럼 기술 발전을 하지 말자는 거냐, 가난해지자는 거냐)

그러나,

진보에 대한 거부는 이윤 추구에 의해 형성된 진보에 대한 거부이지 인간 창조성의 전개에 대한 거부는 아니다. (중략) 문제는 그 창조성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상품하된 형태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맑스는 혁명은 세계의 기관차라고 불렀다. 그러나 아마도 사실은 완전히 다를 것이다. 아마도 비상 브레이크에 손을 뻗는 것은 이 열차에 탄 사람들일 것이다. (발터 벤야민)

4. 주체

우리는 이기고 싶다. 성공은 모종의 주체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그 주체는 어디에 있는가?

많은 좌파 담론에서 등장하는 지배-희생 서사. 체제가 얼마나 끔찍한지. 국가가 얼마나 억압적인지. 우리는 그 체제의 희생자다! 하지만 우리의 희생자화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그것이 비판하고 있는 그 희생자화를 강화하고 끝날 위험이 크다. 이 담론에서 희생자의 잠재적인 주체성은 어떠한 역할도 하지 않는다. 체제는 끔찍하다. 우리는 혁명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파멸을 향한 기차에 타고 있다. 그것을 인식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우리가 그것에 대해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스꽝스럽다.

메모 : 희생자의 잠재적인 주체성이 어떠한 역할도 하지 않는 걸 넘어, 사람들은 희생자의 주체성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 거 같다. 그러면 서사가 복잡해지기 때문. 체제가 끔찍한 걸 ‘알면서도’ ‘자발적인 의지로’ 참여한 사람이 되기 때문에. 하지만 우리는 순수한 혁명적 주체가 아니다. 순수성 검증을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 솔직히 말해 체제를 비판하는 행위는 중독적이다. 사람들이 거기에 중독되어 있다는 생각을 SNS에서 새로운 불매운동이 돌 때마다 하는 거 같다. 비판하는 사람을 비판하고 그 비판을 또 비판하고, 한 달 뒤에 같은 비판 또 하고⋯.

이런 지배-희생 서사에 대한 반작용으로 맑스주의에서 나온 게 코페르니쿠스적 전도. 노동계급은 희생자가 아니라 역사의 추동력이다! 그들이 주체였다! 두둥. 그러나 이것 역시 정반대의 위험을 만든다. 주관적 의지주의의 위험, 우리가 세상의 기존 구조를 인식함이 없이 단순히 우리의 의지에 따라 세상을 구부릴 수 있다는 생각. 수감자의 꿈. 할리우드 영화의 전형적인 주관성.

희생자는 가두어진 자이다. 거기에는 희망이 없다. 영웅은 가두어지지 않은 자이다. 그는 어떻게든 모든 자들 위에 있는 인물, 외부에서 오는 인물이다. 그러한 영웅은 실존하지 않기 때문에 그곳에도 희망은 없다. 급진적은 사회 변화의 가능성을 생각하려면 주체가 그런 것과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

희망은 희생자를 위한 것도 영웅을 위한 것도 아니다. 급진적 변화의 주체는 노동계급도 생산력도 아니다. 그건 바로바로⋯ 풍요다. 우리의 잠재적 창의력의 절대적 발휘.

그러므로 풍요는 혁명적인 주체이다. 우리는 가난한 자가 아니라 풍요로운 자이다. 우리는 가난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풍요, 창조할 수 있는 능력, 행위할 수 있는 힘이 상품 형태에, 화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다른 세상을 위해 투쟁한다. 우리는 풍요로운 자인데 우리의 풍요는 우리와 대립하는 부 속으로 끌려들어가면 궁핍해진다. 우리는 강력한 자인데 우리의 행위력, 우리의 창조력은 우리의 창조성을 부정하는, 그리고 그 창조성을 우리를 억압하는 낯선 논리에 종속시키는 우리에 대한 지배력으로 변형된다. 아니 오히려 우리는 부에 맞서 반란하는 풍요로운 자들이고, 노동에 맞서 반란하는 행위자들이며, 유일의 가치에 맞서 반란하는 사회적 가치들이다. 우리는 화폐 안에서-대항하며-넘어서는 풍요이다.

자본은 풍요에 대한 공격이며, 풍요를 화폐의 논리에 종속시켜 동질화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응은 종종 그러한 풍요를 방어적으로 정의하는 형태를, 즉 정체화의 형태를 취한다. 우리는 브렉싯에 지지투표를 함으로써 우리의 영국성을 방어한다. 우리는 무슬림 침략자들로부터 우리의 프랑스성을 수호한다. 우리는 라틴아메리카인으로서의 우리의 독특한 성격을 옹호한다. 너무 쉽게, 풍요에서 정체화로의 표류가 있고 그것이 끔찍한 결과를 낳는다. 정체화는 파멸로 이어지는 철로이다. 풍요는 우리의 창조적 생성에 대한 상호 인정을 바탕으로 세상을 창조하는 우리의 역량이다.

정체성에 대한 반란은 보통 초기에는 유사한 정체성 형태를 취한다. ex) 퀴어 퍼레이드. 나는 ㅇㅇ인 것이 자랑스럽다는 긍정화의 효과. 그러나 이런 정체성주의적 진술에는 길을 잃을 가능성이 있다. 나쁜-인정(상호 인정이 아닌, 대량 학살을 초래하는 인정)을 재생산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나쁜-인정에 대항하는 풍요는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들리지 않는 것에 귀 기울이기. 비가시성. 잠재성.

공공연한 투쟁에서 잠시 몸을 돌려 (반란의 운동에서 희망을 연구하는 게 무의미하다는 건 아니나 이 책은 다른 길을 열고자 한다) 비복종의 문제를 열기

비복종적인 사람들이 반드시 반항적인 사람들은 아니다. 그들이 반드시 투사이거나 활동가인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본주의에 대한 의식적인 비판조차 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끼워 맞춰지지 않는다. 그들은 어긋난다. 아마도 자본에 충분히 끼워 맞춰지지 않는다는 바로 그 의미에서 그렇다. 자본의 동학은 자본을 점점 더 급박하게 만든다. 자본으로 하여금 더 큰 복종을 요구하게 만든다. (중략) 소진, 대규모 퇴직, 진통마취제 위기, 정신 건강 팬데믹, 이 모든 것들은 자본이 우리가 수긍하지 않거나 수긍할 수 없는 수준의 복종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여러 형태들이다. 자본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저조한 성능의 로봇’이지만 우리의 저조한 성능은 우리의 전투성에서(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간성에서도 기인한다.

희망이 없는 시대의 희망 -> 전혀 명백하지 않고 정체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걸 뒤집자. 깊은 잠재성을 찾자. 자본가를 불쌍하게 여겨라. 그의 두려움은 우리의 희망을 나타내는 지표가 될 수 있다. 피지배자들은 “더 이상 봉사하지 않겠다고 결심”할 수 있다. 모든 지배의 핵심에는 반항이나 비복종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메모 : ‘자본가를 불쌍하게 여겨라’에서 잠깐 웃었다. 책 후반부에서 이 내용을 꽤 진지하게 다시 다룬다. 거기서 감상을 또 쓰겠지만, 아무튼 나는 요즘 우리 회사의 모 임원들이 진심으로 짜증나는 동시에 진심으로 안타깝다. 저 미래에 더 가까워지기 전에 이곳을 탈출해야 한다는 생각도 진심으로 한다.

화폐의 힘은, 우리가 살기 위해 필요로 하는 풍요에의 대안적 접근법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 속에 놓여 있다. 우리는 생산수단과 생존수단으로부터 폭력적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가 창출한 풍요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화폐가 필요하다. 이것은 우리가 노동력을 팔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자본의 지배에 종속되는 것이 물질적 생존수단에 접근하기 위한 조건이다.

형태 안에 가두어지는 우리와 넘쳐흐르는 우리를 나눠서 생각할 순 없다. 그 둘은 같은 사람이니까. 그 둘 사이의 연속성이 곧 자본의 위기, 자본의 취약성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