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여전히 결정하지 못했다
2018년 7월부터 지금까지 한 회사에서 일을 했다. 곧 있으면 팀에 합류한지 만 7년이 되고, 전 회사를 포함해 이 직업을 가진지는 8년하고 반년이 된다. 이제는 어디 가서 몇 년차 개발자라고 소개하기도 부담스럽다. 회사에서 매년 연말 평가 겸 회고를 쓰는데 연차가 쌓이면서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이 점점 바뀌어갔던 게 생각난다. 3년차의 질문: 어떻게 하면 더 성장할 수 있을까요? 5년차의 질문: 근데 성장이 뭐죠? 7년차의 질문: 성장을 매년 꼭 해야 하나요? 참고로 9년차가 된 지금은 성장이라는 단어가 아예 머릿속에 있지도 않다. 작년 연말 평가 때는 오히려 내 쪽에서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자꾸 일방적으로 평가하는 입장에서 물으시는데 그러는 회사는 얼마나 성장했나요? 혹시 올해 반성할 지점은 없었나요?
내 회사는 이름이 알려진 곳이다. 내가 다니는 회사와 그곳에서 만든 서비스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을 SNS는 물론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고, 그건 나의 커리어 내내 기쁨이자 딜레마였다. 회사의 이름값 덕분에 나는 내가 이 업계에 작게나마 발 걸치고 구성원으로서 참여하고 있다는 정체성을 세울 수 있었다. 웹툰, 웹소설, 영화, 애니메이션,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컨텐츠의 세계에. 남들 보기에 그럴 듯한 포장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 또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지 않을까 싶어 양쪽에 이런저런 의견도 많이 발산하고 다녔다. 그러나 마치 끼고 싶었던 친구 무리에 애써서 비집고 들어간 사람처럼 나는 즐거워하다가도 머쓱해했고 때로 내 자리가 여기가 아니며 내 자기 인식이 어딘가 잘못됐다는 감상을 지울 수 없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 정체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내가 결국 창작하는 당사자가 아니었기에 끝까지 좁히지 못했던 동경의 간극이고, 하나는 창작자가 아닌 위치에서조차 업계를 더 좋게 만드는 일은 썩 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이다.
요즘 모바일 앱 다 그렇다지만 내가 만드는 서비스도 광고와 무한 추천 피드로 도배된 지 오래다. 최근엔 기어코 숏츠에도 발을 들였다. 간만에 만난 친구가 요즘 너희 앱에 팝업창 너무 많이 뜬다고 불편을 호소해도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나도 알아’ 밖에 없다. 안타깝게도 그 팝업을 언제 어디서나 잘 뜨게 만드는 게 내 일이다. 비록 팀에 들어온 초창기엔 우리가 재밌는 이야기를 더 널리널리 퍼뜨리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이라는 회사의 홍보성 멘트를 믿었던 거 같지만. 정말 견디기 힘든 건 내가 이 일에 염증을 느끼고 자조하듯이 굴면서도 거기서 창출되는 내 월급은 기꺼이 받아들이며, 여러 사람이 모여 논의를 거쳐 기능의 틀을 잡고 마침내 완성해 나가는 과정은 너무 사랑한 나머지 이걸 위해선 가치관 정도는 포기하고 살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이다. 설령 이 쾌감이 잘못되었고 나는 이 목표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속으로 280번쯤 생각해도. 나는 딱 그 정도로 기만적인 사람이다. 자본주의 로그아웃을 시도하면 뭐하나. 스스로는 어떻게든 모바일 앱의 중독성과 멀어지겠다고 디스플레이를 흑백으로 설정했다가 SNS 앱을 전부 지웠다가 스크린 타임을 걸었다가 socialfocus 를 설정했다가 생난리를 치지만 회사에만 가면 자본주의의 중심부로, 더 많은 사람들을 이 중독적인 화면에 붙들어 놓기 위해 하루에 8시간씩 힘찬 다이빙을 하는데. 충분히 그럴 만한 상황인 걸 알면서도 서비스 이름이 SNS에 오르내리며 강도 높은 비난을 받을 때마다 생채기를 입는 건 덤이고.
일하는 곳이 컨텐츠 업계가 아니었다면 이런 감정을 덜 느꼈을까? 아마 내가 사랑하는 장소를 내가 진흙탕으로 만들고 있다는 감각은 좀 덜 느꼈겠지만⋯. 이직을 하고 싶어도 사람 뽑는 곳이 없는 건 둘째치고 나는 아직 어느 블럭까지 치우고 싶은지도 결정하지 못했다. 회사 일에 이 정도로 일치감을 느끼는 게 기이하다는 데서 시작할 것인가, 이런 나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할 것인가? 수익 창출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취미와 창작 활동을 더 늘리는 것만으로는 왜 충분치 않은가? 얽혀 있는 욕망도 복잡하긴 매한가지다. 가치관에 위배되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 철저히 애플이라는 사기업에 종속된 iOS 기술에서 벗어나고 싶다. 하지만 동시에 필요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다. 일을 굴러가게 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싶고 솔직히 돈은 넉넉했으면 좋겠다. 월 24만원 사설 수영장을 다니는 게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은 벌고 싶다. 나와 같은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까이 있고 싶고, 덜 외롭고 싶다. 디지털 세상에서 즐거움만 취하고 싶다. 사실 고민의 해답을 찾고 싶은 만큼 이 고민 자체를 그만두고 싶기도 하고, 다 떠나서 그냥 회사가 좀 괜찮아졌으면 한다. 여길 떠나서 달리 가고 싶은 회사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친한 친구들은 같은 말을 몇 달째 듣고 있는 기분이겠지만, 나는 아직도 ‘무작정 적을 옮긴다고 뭐가 해결되진 않을 것이다’ 하는 직감밖에 얻지 못했다. 첫 블럭을 고르는 게 이렇게나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