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국제영화제

마지막 공화당원

이번에 봤던 영화 중에 가장 상업적인 재미나 완성도가 좋았다. 소재 자체도 흥미롭지만 감독 본인의 위트가 있어서 완급 조절을 잘하신다고 느꼈음.

진보/보수라는 건 일정 부분 타고나는 게 있겠지. 이 영화 주인공인 애덤 킨징거 의원의 어린 시절 비디오를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저렇게 어렸을 때부터 우파 미학을 사랑하고 로널드 레이건을 사랑하는 정치 오타쿠면⋯ 공화당 가야지 뭐 어쩌겠어? 내가 타고난 성향과 퀴어성과 여성 뭐시기가 저를 좌파에 발 걸치게 만들 듯이 (후천적으로 배우고 학습한 면도 있지만, 타고난 것이 많은 영향을 미치듯이) 저 사람은 저걸 타고난 거야 가부장과 미국과 나라 사랑 법과 수호를 타고난겨⋯ 타고난 걸 우짬.

임신 중절에 반대하고 보수적 가치를 사랑하고, 애초에 원래는 트럼프를 지지해서 공화당에 있었던 킨징거 의원과 그걸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감독은 (감독은 본인이 좌파라고 밝힘) 아마 서로의 어떤 면에 영영 가닿을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는 성립했다는 게 묘한 느낌을 준다.

결정 한번 자기 소신껏 내렸다가 친구 다 잃고 살해 협박 받고 친척 중에서도 자길 저주한다고 인터뷰하는 사람이 나오고⋯ 제일 충격적이었던 건 ‘나는 기도한다 하나님의 분노가 당신의 가정과 당신의 머리 위에 닿기를 진실로 기도한다’는 멘트의 익명 전화였음. 너무나 신실하고 간절한 목소리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정말 진실로 사람이 사람한테 그런 걸 기도하는 거야.

결국 중요했던 건 두 가지.

  • ‘냉소주의에 빠지지 않기’
  • ‘완전히 모르는 타인을 위해 목숨을 건 경험이 어떻게 사람을 바꾸지 않겠느냐?’

누가 울새를 죽였나?

이번 영화제에서 이 영화 봐서 정말 다행이라고 느꼈다. 뭐랄까⋯ 미래를 꿈꾸기 위해선 일단 현재의 생존이 보장되어야 하는데. 자본주의가 얼마나 그지 같은지 톺아보고 비판하려면 일단 오늘 먹을 밥과 덮고 잘 이불은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이 영화의 배경은 ‘한때’ 광산으로 흥했으나 지금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조금이라도 여유 있는 사람은 다 떠났고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일자리도 없고 공동체도 없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지역이고 주인공은 변변한 보호자조차 없음. 이때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일자리가 없는데 어떡?해요? 술 먹는 거 외에 뭘 할 수 있어요? 술 한 잔 사 주는 위로 외에 뭘 건넬 수 있어요? 변변한 보호자를 둔 덕에 주인공보다 쪼끔 더 나은 환경에 있는 친구가 주인공한테 맥주 한 잔 사주는 게 이 영화 마지막 씬인데 이걸 위안 삼아야 할지 더 비통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음

광산이 다시 들어설 수도 있다는 희망고문 같은 말에 정작 광산이 있던 시절은 소문으로만 듣고 자란 주인공이 굉장히 설레 하면서 그럼 노조도 살아날까요? 하는데 정말 미칠 거 같음 노조가 있고 광산이 있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게 그때의 풍요로움 때문인지 활기 때문인지 외로움 때문인지 약자가 약자를 할퀴게 만드는 잔인함이 너무 생생한 영화라 주인공이 기타 치는 장면에서 같이 울었음 근데 그 눈물에 대해 영화는 어떤 희망도 말해주지 않음 술이나 한 잔 줄 뿐⋯

집에 살던 새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꽤 괜찮았다. 닭에 대한 이야기고 동물권을 다룬다는 것만 알고 갔는데 우선 감독이 영화 스크린 안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게 다큐멘터리 문법에선 좀 새롭다고 느꼈음. 보통 카메라 잡은 사람이 인터뷰이에게 질문 던지는 목소리 정도는 오디오에 잡히기 마련인데? 이 영화에선 감독의 존재가 단 한 순간도 스크린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채 영화가 진행되는 게 인상적이고 채식 vs 육식, 내지는 동물들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지 등의 ‘동물권’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문제를 엮어 하나의 이야기로 만드는 솜씨가 좋다고 느꼈음. 개인적으로 오프닝 시퀀스와 강아지 키우는 여성 장애인 분 인터뷰가 정말정말 좋았다. 자기가 없으면 혼자 산책도 못 나가는 이 집이 강아지에겐 시설이지 않냐는 말이 어쩐지 깊게 닿았다.

이 얘기 한 30분 더 해주면 좋겠는데 딱 한 시간으로 끝나서 아쉬웠고, 중간중간에 닭에 대한 민화 애니메이션 넣어주는 것도 귀여웠다. 이미지를 잘 활용한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영화 끝나고 찾아보니까 이게 전시의 일부를 영화로 만든 건가 보더라구요? 그리고 이 전시회를 기획한 작가이자 영화의 감독이었던 분이 밑에서 읽었던 『제로의 책』 저자인 걸 알게 돼서 그것도 반가웠음.

스쳐간 텍스트

나의 힘은 쓰레기통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사랑하는 쓰레기들의 이름을 호명하겠다. 아름다운 여성, 수동적인 여성, 여성이 더 싫어하는 여성, 임신과 출산, 낙태를 경험한 자궁, 반역자들, 거짓말쟁이, 천한 사람, 창녀, 성산업에 종사하는 퀴어들, 죽고 싶은 페미니스트, 누구도 살리지 않는 여성, 성폭행을 경험한 이, 성욕이 들끓는 청소년, 아픈 사람, 장애가 있는 사람, 성도착증 환자, 미친 사람, 약 없이는 잠들 수 없는 사람, 비속어, 일기, 유려하지 않은 글씨체, 가난한 사람, 지방에 사는 사람, 권력욕이 없는 사람, 비인간, 비거니즘, 죽음, 주위 사람의 죽음을 겪은 이, 자살을 기도한 사람, 자살 후보자, 저녁 6시에 일어나는 사람, 운동할 돈이나 마음이 없는 사람, 요리할 수 없는 사람, 청소할 수 없는 사람, 만화 속 인물과 결혼하고자 하는 사람, 알바로 생을 연명하는 사람, 비정규직, 노동자, 일자리 없는 사람, 레즈비언, 하루에 오프 세탕 뛰는 레즈비언, 부치, 부치인지 트랜스인지 헷갈리는 사람, 트랜스젠더, 드랙 아티스트, 사도마조히스트, 팸섭, 최악의 성소수자, 폴리아무리, 울면서 자신이 겪는 일을 찍는 사람, 결국은 써내는 사람, 그래도 울분이 풀리지 않는 사람, 자기 이야기만 하는 정신병자, 우리의 친구들. (9p)

물듦 (유운성, 미디어버스)

왜냐하면 현재 부르주아지는 변화를 겪고 있거든요. 고전적 부르주아지에 대한 이런 식의 분개와 분노는 더는 근거가 없어요. 부르주아지는 대대적인 변화를 겪고 있거든요. 그것은 모든 사람을 프티부르주아지로 동화시키고 있어요. 인류 전체가 프티부르주아가 되어 가고 있죠. 그래서 새로운 문제들이 있고 이런 문제들은 부르주아지 구성원들 스스로에 의해 해결되어야 하는 거겠죠. 노동자들이나 부르주아지 적대자들이 아니라요. 우리 같은 반체제적 부르주아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고 ‘자연적’ 부르주아도 해결할 수 없어요. 이 영화(테오레마)가 ‘유보된’ 채로 남는 건 그 때문이죠. 그건 울부짖음으로 끝나죠. 그리고 울부짖음의 바로 그 불합리성이 해답 없음을 전달하는 거고요.

제로의 책 (돛과닻)

대학 다닐 때 한 친구가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어. 산을 정말 좋아하는데 건축은 산을 깎아내는 일인 것 같다고. 그때 나는 “그래도 산을 좋아하는 네가 건축을 해서 정말 다행이야.”라고 말했어. 그 말을 이제 나를 향해 돌려놓고 합리화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대안은 시간을 되돌리는 거예요. 대단히 어렵더라도 말이죠. 그리고 결정을 다시 해야 합니다. 다시 한다는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어요. 첫 번째 의미로는, 형편이 되는 사람들은 서비스에 대한 비용을 실제로 지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검색 비용을 지불하고, SNS 사용료를 지불하는 겁니다. (중략) 때로는 댓가를 지불하면 더 나은 걸 얻게 됩니다.

오히려 이후 발레를 가르치는 걸 그만두고 나서야 발레를 ‘완전히’ 다르게 바라볼 수 있었는데, 나와 발레가 직접 연결되지 않았을 때, 특히 내 생계를 보장할 발레 전공자라는 스펙을 더 이상 이용하지 않았을 때 그 시도가 가능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발레의 미적 기준, 서사, 교육 방식 등이 못마땅했고, 내가 그 움직임을 체화하고 수업에서 답습하고 있다는 사실에 적지 않게 마음이 부대꼈다. 이미 대학생 때 “발레 한 걸 후회해요”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 정도로 문제를 체감하고 있었지만 발레 전공자라는 혜택은 한국 어디에나 있었고, 그것을 끊어내기 어려웠던 것이다. 주변에서는 내가 왜 이미 보유한 자격증이나 다름없는 발레를 놔두고 굳이 다른 방식으로 돈을 벌려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안정감이 가지방석인 시기였다. (71p)

내 안에서 발레 이야기가 완전히 사라진다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파고들 만큼 파고들어서 일단락되거나, 스스로 질려버려서 관둘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가 속한 세계를 한번 뒤집어엎어본 이 경험이 내 삶과 작업의 방향을 많이 바꿔놓을 거라는 것은 확신하고 있다. 작업과 삶이 분리되지 않는 무엇이라면, 이 작업은 그동안 어느 자리에서나 불편했던 나를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는, 다시 말해 지금의 삶을 다음 챕터로 옮기는 하나의 행위일지도 모르겠다. 발레라는 예술이 가진 어떤 위상들, 명예들, 그 안에서 들썩이는 많은 욕망들을 내려놓고 ‘제로’의 상태에서 시작될 무언가를 기다린다. 그 안에서 다른 삶이 펼쳐지기를. (80p)

그리고 이 목록에 올라간 야생목록의 수출과 수입이 규제되었다. 이와 함께 ‘동물원의 번식 프로그램’이 시작된다. 새로운 동물을 포획할 수도 구매할 수도 없게 된 동물원의 입장에서 동물원을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방책이었던 셈이다. 그리하여 동물원을 위한 새로운 변명거리가 만들어졌다. “동물원은 동물종을 보호한다”는 말이었다. 이제 우리는 “동물원이야말로 야생에서 위협받고 있는 종들을 위한 마지막 피난처”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99p)

서울이 아니라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김희주, 일토)

워라밸은 단지 일과 여가의 시간 분배를 적절히 하는 것이 아니다. 내게 워라밸은 일과 삶이 서로 유리되지 않고 일을 수행하는 주체와 삶을 꾸려 가는 주체가 자기 안의 모순에 고통받지 않는 밸런스이다. (53p)

그때 알았다. 내가 서울에 계속 살았어도, 서울에서 집을 샀어도, 회사에 계속 다녔어도, 부장이 되고 임원이 되는 경로를 따랐어도 나는 그 사실에 감격하거나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나는 세상 무엇보다 내가 제일 소중하다. 그래서 경제적 물리적 환경이 주는 안정감보다 내가 충실함을 느끼는 상황이나 상태에, 내가 훼손되지 않는다고 느끼는 공간이나 관계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131p)

근황과 인사, 그리고 리원과 한결 얘기

휴가 긴 국가는 대부분 제국주의 주축국이었는데 인건비 낮고 격무하는 곳은 전부 식민지였다는 게 의미심장하지 않나요? 이처럼 내가 누리는 무언가가 수상할 정도로 편리하거나 싸면 우리가 무엇을 착취하고 있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규범을 깬 여성은 우리 편이 아니다.”는 생각을 심어준 건 무엇입니까? 규범이 깨진 삶엔 존엄과 품위가 없으며, 절대 용서 받지 못할거라 협박하는 건 뭡니까? 그런 협박을 최초로 한 존재는 누구며, 왜 그는 협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했습니까?

세상은 흑백으로 나뉜 적 없습니다. 더럽게 복잡하다는 것만이 진실입니다. 무언가에 대해 딱 잘라 말할 수 있다, 단죄할 수 있다고 말하는 새끼들을 주의하십시오. 사기꾼입니다. 또한 심력이 남아도는 분이 있다면 저와 함께 합시다. 사기꾼들을 연민합시다. 상처를 이해해보되 폭력은 용납하지 맙시다. 용납하지 않더라도 단죄하자고 같이 돌 던지지 맙시다.

나는 이 글을 리원만 구명하려고 쓴 게 아닙니다. 예외적인 진실이 예술 안에 있고 나는 밧줄 하나 정도 만들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걸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구해야 합니다. (…) 내 모든 글은 ‘누가 누구에게 정확히 사랑 받았다/못 받았다’ 한 줄로 끝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굳이 더 쓰는 게 예술이며, 세상 일 중 ‘굳이’ 하는 일이 가치 있는 일인 겁니다.

마차살

—는 병이다: 지긋지긋한 표어. 네 사랑은 병이고 네 생각은 병이며 네 삶은 병이다. (678화)

나는 나와 함께하는 사람이 행복해하는 걸 보고 싶어. 나를 데리고 아일랜드로 돌아가고 싶다 한대도 우리가 결혼까지 할 정도라면, 나는 분명 너를 인간으로서 마음 깊이 사랑하고 있을 테니 충분히 그러자고 할 거야. 미국식 문화 따위는 네가 알지 않아도 돼. 네가 원하는 방식의 사랑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나는 어떤 방식의 사랑이든 내놓는 법을 배웠고, 네가 행복하다면 기쁜 마음으로 진심을 담아 그렇게 할 수 있어. 포장지가 바뀌었을 뿐 너의 행복을 구하는 내 마음이 사랑이자 진심이리라는 건 사실이야. (689화)

에르는 정부가 바라는 바가 참으로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인재도 초국적 영향력도 모두 가지고 싶지만, 그 인재는 보이지 않는 밑바닥을 굴리는 유능한 부품으로만 작용해 주었으면 하고, 프랑스가 외국인이나 유대인 같은 이민족으로부터 ‘더럽혀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 태도는 오히려 이제 막 통일 제국을 수립해 민족 정신을 완성하는 데에 애쓰던 고집스러운 군사국가 독일에서 차라리 좀 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는데, 이 반국제적이고 반유대적인 태도가 누구보다 자유와 평등과 박애를 표방하는 프랑스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 프랑스 전역에 합법적인 백지 구속영장이 나돌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음은 누구인가? (694화)

그렇지만 이때 생각해 봐야 할 것은, 한 군데서 약자인 자가 다른 곳에서는 강자일 수도 있으며, 약자성을 하나라도 가진 자가 언제나 모든 약자를 위하지는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랬다면 모든 빈자는 부처여야 했고 사람들은 내 친구를 죽여서는 안 됐다. 그리고 내가 아는 로잘리 블랑샤르 - 그리고 그의 연장선에 있는 로잘리 레스트랑주는, 모든 약자를 위할 리가 없는 사람이다. (699화)

이 모순적인 상태가 공존하는 곳이라는 걸 잊고서 인권 운동을 할 수는 없어. 인간으로서 우리는 반드시 죽은 자가 우리 곁에 살아있도록 만들어야 하는 법이지. 그것이 나의 여성학이네. 나는 잊힌 자들을 불러내야 해. 나머지 세상의 절반인 자네들이 우리를 완전히 잊어버렸기에⋯⋯. (70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