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한 달간 『창작하는 아침』 모임에 참여하게 됐다. 1분기 회고에서도 짧게 언급했던, 요즘 즐겨듣는 팟캐스트 『강소팟』의 두 호스트 강단과 소신이 운영하는 곳으로 매일 아침 6시에 zoom으로 만나 각자의 창작을 한 시간 동안 하고 헤어진다. 나흘 남짓 경험해 보기로는 제법 간결하다. ‘창작이란 무엇일까요’ 내지는 ‘우리는 왜 창작을 해야 할까요’ 같은 오리엔테이션 성 질문은 아무도 하지 않고, 그저 이번 달에 무엇을 만들 건지 공유한 다음 만든다. 창작의 범주도 꽤 다양한데 이곳에선 농사도 창작에 들어가고 체력을 키우는 것도 창작에 들어가고 심지어는 명상도 창작에 들어가는 듯하다. (없던 여유를 만들었으니 멋진 창작인 셈이다.)

모임에서 나는 이번 달에 하고픈 창작을 두 가지로 소개했다. 개인 블로그 만들기와 농놀 마지막 책 만들기. 서브컬처와 아무 연관이 없는 모임에서 굳이 후자도 빼놓지 않고 언급한 건 그게 정말로 내가 이번 달에 해야 하는 창작 중 하나여서기도 하고 그걸 언급하지 않고선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기분이 들어서기도 했다. 창작이라는 근사한 껍데기 안에서 나는 여전히 해야 할 말을 하고 있지 않다고⋯. 여전히 그런 기분이 든다. 아니나 다를까 책을 만든다고 이야가하자 내가 이전에 만들었던 책을 궁금해하는 댓글이 달렸는데, 그 댓글을 보고 나니 더더욱 한번은 정리가 필요할 거 같아 이번 주의 글을 쓰게 됐다.

블로그 만들기나 에세이 쓰기 같은 취미는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다. 반면 2차 창작 소설은 결과물을 남한테 보여주기가 상당히 부끄럽다. 오리지널이 되는 1차 작품을 아는 사람은 알기 때문에 부끄럽고 아예 이쪽 세계를 모르는 사람은 몰라서 부끄럽다. 이건 장르의 문제일까?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보이는 수단으로서 에세이의 껍질과 소설의 껍질은 확실히 다르고, 소설을 썼을 때 드러나는 맨살이 에세이의 그것보다 더 부끄럽다는 건 그리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현상에도 그럭저럭 잘 들어맞는다. 하지만 내 경우 소설을 써서 남에게 보인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마글방에서도 짧게나마 도전했었고 TRPG 취미가 있는 만큼 내가 만든 캐릭터의 백스토리도 종종 썼었다. 기록으로 남기지 않은 건 더 많다. 요컨대 글을 놀잇감으로 여길 수 있을 때는 이 정도로 부끄러워하지 않았었다.

그렇다면 소설 내 세부 장르의 문제? 로맨스 소설이 비로맨스 소설보다 남들에게 보이기 조금 더 부끄러운 건 사실이다. 내가 사랑하는 두 사람의 센슈얼하고 섹슈얼한 교감을 이런 식으로 상상한다는 건 솔직히 실제 친구들에겐 전혀 알리고 싶지 않은 정보다⋯. 하지만 모든 로맨스 소설이 동일한 수준으로 부끄러운 것은 아니고, 또 모든 비로맨스 소설이 동일한 수준으로 덜 부끄러운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컨텐츠를 즐길 때마다 망상을 멈출 수 없었던 오타쿠로 거의 20년을 살았고 끊임없이 나를 전시해 왔는데 이제 와서 그 망상의 결과가 부끄럽다는 건 어딘가 석연치 않다. 그렇다면 이 낯선 기분은 어디서 기인하는 걸까?

나를 드러내는 글쓰기, 솔직한 글쓰기 같은 표어를 사람들이 많이 이야기하지만 내가 생각했을 때 2차 창작에서 강하게 드러나는 글쓰기는 욕망의 글쓰기다. 2차 창작은 남이 써 내려간 이야기의 텃밭에 내 욕망의 씨를 심어 키우는 창작이다. 로맨틱하고 성애적인 욕망, 어떤 캐릭터를 나와 동일시하는 욕망, 이런 사랑을 누리고 싶다는 욕망, 나도 과거를 극복하고 나아가고 싶다는 욕망, 그리고 내 이름 걸고 자전적 에세이로 썼으면 독자를 얻기 참으로 어려웠을 이 텍스트 범람의 시대에 원작 팬들을 잠정적 독자로 확보할 수 있는 데서 오는 연결됨의 욕망. 이 총체적인 욕망이 부끄러움의 핵심이다.

내 입으로 직접 내 욕망을 말할 땐 이 정도로 노골적이기 쉽지 않다. 반면 내 소설 속 인물 - 그러나 원작에서 빌려 왔기 때문에 이미 어느 정도 형체는 갖춰져 있는 인물 - 의 입과 서사를 빌려 욕망을 말하면 내가 얼마나 날것의 인간인지가 생생하게 드러난다. 이렇게 소설은 내 욕망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심지어 글솜씨가 옹졸해도 독자는 늘 똑똑하기 때문에 내가 욕망을 가장 그득그득 눌러 담아 쓴 곳을 반드시 내 글의 본래 힘 이상으로 캐치한다. “이러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는 캐릭터 A가 너무 안타까웠어요 ㅠㅠ” 같은 댓글을 보면 기절할 지경이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거기 쓰인 건 한때 무척 위로받고 싶었던 내 어느 시절의 투사니까.

작품과 캐릭터를 사랑해서 2차 창작을 한다고 말하기가 애매한 것도 그래서다. 그 사랑이 나를 끌어낸 건 맞지만, 진실로 사랑하는 것도 맞지만, 타자를 향한 사랑과 나를 향한 자기애는 어디까지 구분되는 걸까? 사랑의 ‘진정성’은 그렇게나 중요한 덕목일까? 게다가 다른 영역의 글쓰기가 그렇듯 2차 창작도 창작자-글-소비자라는 선형적인 구도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창작자와 창작자 간의 관계가 있고 소비자와 소비자 간의 관계가 있으며 그들 사이에 오가는 친애와 욕망이 또 있다. 때로는 그쪽이 더 강력한 동기가 되어 이곳을 맴돌기도 한다. 일 년 하고도 반년간 겪어보기로는 그랬다. 차분하게 아침 일찍 책상 앞에 앉아 차 한 잔 마시며 조금씩 붙여나갈 수 있는 에세이와 달리 2차 창작은 신내림 받은 듯이 쓰고 더 널리 내 욕망을 퍼트리기 위해 분투한다. 지지해 주는 사람들에게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든 내가 나를 주체 못해서든. 내 글솜씨가 어떻든 얼마나 고통스럽든, 이 글이 어디로 달려 나가든.

다 쓰고 나니 어쩌면 그 신내림의 순간과 엉망진창의 즐거움을 잊지 못해서 이 글을 썼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