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터와 유튜브가 내 일상을 잠식하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부터 디지털 디톡스를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 왔다. 스크린 타임 걸어놓기는 기본이고 스마트폰 디스플레이를 흑백으로 바꿔보기 (꽤 효과적인데, 정확히 그만큼 삶이 재미없어진다), 아예 SNS 앱 지우기 (이러면 웹으로 접속하게 된다. 그래서 아이폰 설정에서 유해 사이트로 지정해 웹 접속도 차단하면, 역시 삶이 재미없어진다), 업무용 스마트폰과 개인용 폴더폰을 따로 두기 등 온갖 방안을 시도하고 검토해 봤지만 그 중 어느 것도 오래 성공하지는 못했다.

내가 생각했을 때 디지털 디톡스가 성공하기 힘든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1. 상시 여기에 접속해 있을 것을 기본 전제로 하는 사회 환경 속에서 2. 오로지 나 개인의 의지로 탈출을 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24시간 365일 디지털 사회에 연결되어 있을 것을 모두가 요구한다. 카카오톡 아이디가 없는 대한민국 국민을 우리가 상상은 하나? 본인인증을 위해 문자 서비스를 이용할 때 ‘휴대폰을 소지하지 않을 자유가 있는’ 사람을 우리가 고려하나? 그런 사람은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이 사회가 가정하기 때문에, 출생신고를 하면 주민번호가 생기듯 마치 어느 나이가 되면 스마트폰과 SNS 계정이 자동 생성되고 그걸 사용하는 게 의무인 것처럼 돌아가기 때문에 디지털 디톡스는 쉽지 않다. 개발자라는 내 직업 면의 문제도 작지 않다. 스마트폰이 있어야만 일을 할 수 있는 직업인데 스마트폰을 쓰지 않겠다는 건 일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나 하나만 디톡스를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그래서 온전히 끊어낼 수 없고,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 순간 나는 또 블랙홀 같은 추천 타임라인 속으로 빨려들어와 있다.

언젠가 한번 생각을 해봤다. 나는 왜 유튜브 숏츠를 필요로 하는가? 내 뇌를 도파민으로 지져서 ‘생각하지 않는 상태’를 만들고 싶기 때문에. 그렇다면 왜 생각하고 싶지 않은가? 삶이 너무 피로한데 피로를 타파할 방법은 보이지 않아서. 그렇다면 삶이 왜 피로한가? 여기서부터는 생각이 길어지니까 패스. 핵심은, 내가 해결책을 잘못 찾고 있다는 거다. 피로를 해소하기 위한 대안으로 숏츠를 보고 있는데 피로는 타파하지 못한 상태에서 숏츠만 끊으면 당연히 사는 게 더 힘들어진다. 개인의 금욕주의로 삶을 컨트롤하는 방식은 오래 가지 못한다. (사실 나는 이제 이성을 통해 신체를 통제한다는 발상 자체에 점점 회의적이게 되어가고 있다. 누구나 그런 통제 가능한 이성과 통제 가능한 신체를 갖고 태어나지도 않았을 뿐더러, 자본주의가 주는 억압을 어째서 내 신체를 통제함으로써 해결해야 한단 말인가?)

최근에 읽었던 책 『휴식은 저항이다』에 따르면 우리는 결코 과로문화의 것이 아니다. 우리 몸은 해방의 장이며 휴식은 그 자체로 자본주의와 백인우월주의에 대한 저항이 된다. 어째서 그렇게 되나요? 하면 그건 이렇고 저래서라는데, 사실 이 책은 휴식이 왜 저항인지 꼼꼼하게 설명해 주는 논픽션이 아니라 휴식을 전파하기 위한 종교 지침서에 가깝다. 신학대를 다니며 흑인여성주의와 흑인 해방 신학에 대해 연구하던 저자가 어느 날 휴식이 곧 저항이라는 깨달음에 다다라 낮잠사역단(Nap Ministry)이라는 단체를 만든 것이 이 책의 탄생 배경이고, 저자도 스스로를 낮잠의 주교(Nap bishop)라고 소개하고 있다.

낮잠사역단에 대한 이야기를 읽다보면 요가의 사바아사나가 생각난다. 요가를 해본 사람이면 알 것이다. 수련 마지막에 꼭 껴 있는 매트에 눕는 시간. 잠깐만 잠들었다 일어나도 효과가 아주 좋은 휴식 시간. 요가도 사실 영성과 연관이 있는 활동이니 낮잠사역단과 요가의 사바아사나는 결이 비슷하기도 하다. 요가 강사님 중엔 간혹 사바아사나 할 때 귀 뒤에 시원한 향 같은 거 뿌려주시는 분들도 있었는데. 아무튼 안전이 보장된 공간에서, 같은 목적 의식을 갖고 함께 모인 사람들이 휴식을 취할 때 생기는 아주 느슨한 소속감이 있다. 그리고 나는 진지하게 그게 연대의 시작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느슨한 소속감이 겹치고 겹쳐 우리 발 아래를 튼튼하게 한다. 적어도 나는 그걸 필요로 하는 편이다.

『휴식은 저항이다』에서 말하는 휴식은 과로로 지쳐 쓰러지듯 잠드는 휴식이 아니다. 휴식의 형태로 낮잠을 택했다면, 너무너무 피곤하고 졸려서 자는 낮잠이 아니라 저항으로서 자는 낮잠이어야 한다. 이게 중요하다. 휴식을 행할 때 이것이 저항으로서 행하는 휴식임을 내가 잊지 않아야 한다. 그것만 보장된다면 휴식의 방식은 뭐여도 상관없다. 차를 마시든 향을 피우든 낮잠을 자든 그냥 멍을 때리든.

나는 여기에 특별히 ‘자본주의 로그아웃’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내 안에서의 이미지는 일종의 게임이다. MMORPG 게임을 상상해보자. 우린 모두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거대한 VR 게임에 들어와 있다. 나한테는 분명 이 VR 게임을 일시 정지하고 잠깐 물 마시고 올 수 있는 버튼이 있는데 게임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가끔 그 버튼이 나한테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그걸 하루에 한번씩만 인지해 보면 어떨까. 로그아웃 뭐 별 거 있나? 인터넷 끄고 스마트폰 끄고 자연 소리 좀 들으면서 쉬면 로그아웃이지. 중요한 건 언제나 내 손에 이 로그아웃 버튼이 쥐어져 있다는 사실을 내가 잊지 않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내가 벗어날 수 없는 절대적 환경’으로 여기지 않고, 언제든 로그아웃해 나와서 잠깐 바깥 공기를 내쉬고 다시 입장할 수 있는 VR 월드로 보는 관점.

거창하게 썼지만 내가 하고 있는 건 별 거 없다. 매일 자기 전에 명상 시간을 갖는다. 최근 수관기피에서 샀던 앰비언스 음악 시디를 틀고, 방 조명을 모두 끈 다음 언젠가 소품샵에서 샀던 미니 스위치 조명을 켠다. 요가 매트 위에 앉는다. 뭔가 생각나는 게 있으면 생각을 하고, 생각나는 게 없으면 에구구구 삭신이야 스트레칭을 한다. 시디 한 바퀴 다 돈 거 같다 싶을 쯤에 일어난다. 생각한 게 있었다면 기록한다. 나는 요즘 짧은 일기는 슬랙으로 남기고 있는데, 대강 이런 느낌이다.



이렇다 할 큰 변화가 있었던 건 아니다. 첫날은 명상을 하는데 갑자기 어떤 친구에게 연락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명상 끝나고 휴대폰을 손에 들고 잠깐 망설이다가 밤 12시에 (내일로 미루면 어쩐지 못할 거 같았다) 미련 남은 전 애인처럼 카톡을 했다. 잘 지내니. 혹시 안 바쁠 때 놀러가도 되니. 5월은 가정의 달이라 이미 약속이 많고 6월쯤… 예전엔 네이버 블로그 이웃이었으나 블로그의 AI 학습 약관에 동의하지 않아 블로그를 없앴던 친구는 작년 말쯤 트위터 계정도 같은 이유로 버리고 떠났다. 다른 SNS를 하지도 않으니 이제 나는 그 친구의 근황을 자연스럽게 들을 방법이 없는데 우린 사는 지역도 멀고, 오프라인으로 보지 못한지 꽤 됐고, 이대로 가면 가뜩이나 느슨했던 친구 사이가 더 이어지지 못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거 같다. 그런 거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스스로도 좀 의외였다.

하지만 그런 깨달음다운 깨달음이 있었던 건 첫날뿐이고 대부분은 잊고 있던 TODO가 정리되는 시간이다. 아 맞다, 아빠가 5월쯤에 가족 여행 한번 가자고 했었는데. 어디 가지. 끝나고 숙박 예매해야겠다. 아 맞다, 나 이거 관심 있어서 북마크해 놨었는데. 신청할까? 이따가 봐야지. 아 맞다, 오늘 회사에서 PR 코멘트 너무 날카롭게 달았던 거 반성해야 돼. 반성. 미안합니다. 근데 운동하고 샤워한 다음에 이러고 앉아 있으니까 좋네. 역시 운동을 해야 해. 회사에 간식 한번 사다갈까. 아 근데 회사 생각은 너무 많이 하지 말자. 나는 로그아웃했다. 나는 로그아웃했어…

오늘도 이 글을 올리고 나면 오늘치의 자본주의 로그아웃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기록이 많이 쌓이고 나면 다시 쓸 말이 생길 텐데, 그건 그때 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