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컬처 연구 온리전
때는 3월 19일 수요일. 트위터 타임라인에 갑자기 “서브컬처 연구 온리전”이라는 행사가 아무 예고 없이 등장했다. 그것도 이미 고정된 날짜와 장소에 풀 컬러 일러스트가 가미된 포스터, 즉시 입금 가능한 신청 링크를 달고.
웬만해선 트윗 북마크만 해 두고 일 마저 하고 저녁에 다시 확인했을 텐데 이 행사는 도저히 그럴 여유가 없었다. 게임, 아이돌, 퀴어, 웹소설, BL, 2차 창작 등등을 다룰 건데 관련 분야 연구자 네 명이 이야기를 나눈다? 그럼 그 자리에 모이는 사람도 전부 이런 주제에 관심 있는 사람이겠네? 그런 기회는 정말이지⋯. 신청 떨어진 사람들과 수도권 접근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줌(zoom) 링크도 열어주는 게 도리라고 우겨야 할 판이었다. 어떻게든 가야 한다는 마음으로 즉시 입금과 신청을 마쳤는데, 나중에 듣기론 트윗이 올라간지 세 시간 만에 이미 정원 초과였다고 한다.
그럼 그런 귀하고 즐거운 행사를 다녀왔으니 행사 분위기가 어땠는지 얼마나 좋았는지 자랑하는 사진이 나올 차례인데, 사진이 없다. 대관 장소였던 ‘슬금슬금’은 홍대입구역 근처에 위치한 펍으로 낮에는 성산커피클럽(SCC)라는 카페로 운영하다가 저녁에만 펍이 되는 곳이었다. 나는 그날 행사 시각보다 한참 일찍 도착해 성산커피클럽에서 커피까지 마셨는데 그 커피 사진조차 안 남아 있다. 평소에 사진 잘 안 찍는 게 이렇게까지 티날 일인지? 다행히 주최 측에서 행사 촬영을 하셨으니 기다려보면 공식 계정에 뭐라도 올라오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지금 남은 건 각 부스에서 받은 무료 나눔 회지뿐이다. A4에 인쇄해서 주신 분도 계셨고 A5 중철 돌발본을 주신 분도 계셨고 - 역시 온리전 경험자의 연륜 - 여건상 인쇄를 하지 못해서 구글 드라이브 링크를 주신 분도 있었는데 그 링크는 심지어 잃어버렸다 새로 보내주셨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휴대폰이 방전되어서 다른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남은 기억마저 휘발되기 전에 뭐라도 써 놔야 나중에 찾아보지 않을까.. 싶어서 후다닥 쓰는 메모글.
서브컬처로 케이팝 읽기
- 두 장의 A4 회지를 나눠 주셨는데 그 중 하나는 아직 공식적으로 발행되지 않은 글이라 SNS에는 공유하지 말아달라고 하셨다. 따라서 여기서도 구체적인 내용은 패스. 사실 알페스는 아직 내 장르였던 적이 없어서 Real Person을 엮는 그 감성을 100% 이해하지는 못했는데 글 제목이 무성애라는 단어를 포함하고 있어서 거기에 자꾸 눈길이 갔다. 나중에 공식 발행되면 또 무성애 단어만 보고 저 부르셨어요? 하고 뛰쳐나올듯.
- 꼭 응원봉을 사야만 팬인가? 하는 질문이 잠깐 나왔는데 매우매우 공감했다. 팬이 되는 것, 내가 이만큼 그의 팬이라는 걸 증명하는 방법이 전부 자본주의적 소비에서 출발하는 것에 어떤 거부감을 느낀다. 응원봉, 포카, 키링, 포토북, 스티커, 아무튼 각양각색의 굿즈들. 플라스틱 굿즈는 이제 그만 사고 싶은데 케이팝 아티스트는 계속 사랑하고 싶고 팬 커뮤니티에서 나의 헤비한 덕심을 인정도 받고 싶다면, 그런 팬덤은 어떤 문화를 가져야 달성할 수 있을까.
플랫폼 시대의 커뮤니케이션 실천. 팬들은 더 이상 단순히 콘텐츠를 소비하는 게 아니라 소통하고 연결되기 위해 콘텐츠를 쓰고 해석하고 전파한다. 하지만 플랫폼이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통제하고 수익화한다는 점은 또다른 긴장을 만든다.
이 주제로 300p 단행본이 나왔으면 한다면 욕심이 너무 과한가요? 하지만 정확히 저 제목의 총서가 있었으면 좋겠다. 덕질하려면 그래도 트위터는 있어야 된다는 말이 어느 장르에서나 통용되지만 2025년에 이르면 솔직히 좀 억울하다. 멜론 머스크의 이 꼴과 저 꼴을 다 보면서도 여전히 내가 트위터를 써야 한다는 사실이 열받아요. 당장 이번 행사도 트위터가 아니었으면 소식을 몰랐을 테고. 서브컬처에 대한 이야기를 플랫폼 측면에서도 ‘서브컬처스럽게’ 전달하고 유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요즘 정말 많이 생각한다.- 그나저나 『퀴어돌로지』 쓰던 당시엔 이 책으로 자기는 완덕한 거라고 생각하셨다는 말이 너무 웃겼다. 책을 통해 선생님을 알게 된 원거리 독자의 입장에선 그게 시작이었는데요 ㅠㅠ
세계 끝의 덕질 : ‘팬픽 트러블’과 포타 플랫폼
- 그렇다고 합니다. 팬픽 지원금 받고 알페스 썰 푸실 분들은 dasim901@snu.ac.kr로 연락하자! 여돌/남돌 안 가리고 아이돌 외 팬픽과 나페스도 환영이래요 ^^
- 발표자 분이 『세계 끝의 버섯』에 대해 열정적으로 말씀하실 때 웃참하느라 힘들었다. 그 순간만큼은 이게 서브컬처 연구 온리전이 아니고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책 간증회였다. 알라딘 장바구니에 이미 담겨 있긴 한데 아직 집에 쌓아놓은 업보가 많아서 바로 사지는 못했다. 근데 정말 언젠가는 읽어봐야 하나 봐.
한때 팬덤 문화의 '코어'였던 팬픽은 팬덤 주류화의 흐름 속에서 매우 '문제적인' 영역이 되었다. 팬덤 파워의 원천이라고 하는, '공굿 소비'를 중심에 두는 '순덕'이 찐팬이 되고, '과몰입'과 '호모질'을 하는 팬픽러들은 팬덤 내부에서 정화와 규율의 대상이 되었다.
오⋯ 흥미로워요. 팬픽이 어쩌다 팬덤 문화의 가장자리로 밀려났는지도 궁금하고 (진짜로 모르는 영역이라) ‘공굿 소비’가 어쩌다 순덕과 비-순덕을 가르는 기준이 되었는지도 궁금하다. 저 대비를 보고 바로 떠올린 건 자본주의에 부합하며 돈 써주는 활동과 그렇지 않은 활동이라는 거였는데 ㅋㅋㅋ포스타입은 '블로그 발행'과 '수익 모델'을 직접적으로 결합시켜 '블로그로 후원받아 누구나 직접 돈 벌 수 있다'를 어필했지만, 팬픽러들은 '다른 용도'로 포스타입을 활발하게 사용해 왔다.
오⋯ 그런 배경이. 일단 난 2023년의 퍼슬덩으로 2차 창작에 입문한 지라 포타 이전 시대는 잘 모른다. 갠홈? 텍본? 어디서 주워듣기만 했지 아무것도 모른다. 누가 그런 역사도 정리해 줄 법한데. 동인 플랫폼의 변천사. 꼭 연구자의 언어로 정리되지 않더라도 우리끼리는 그런 야매 아카이브를 만들어 볼 법하다는 생각도 든다.- 논의를 연장해서 최근에 있었던 포스타입의 수수료 인상 공지와 거기서 생각해 볼 앞으로의 우리 방향에 대해서도 얘기해 보고 싶었다. 나는 포타를 버리고 무슨무슨 플랫폼으로 새로 이사 가자는 얘기에는 별로 동의하지 못했고 (아직 트위터도 버리지 못한 우리가 그런 말을?) 그런 식으로는 현상이 무한 반복될 뿐이라고 생각했다. 2차 창작은 그 자체로 일종의 저항이다. 모두가 어떻게든 돈 되는 일에 달려드는 이 시대에 돈이 되긴 커녕 돈을 창출했다간 법적으로 복잡해지는 회색 지대에서 그저 애정만 갖고 이어나가는 창작 활동. 이건 정말이지 저항이고 태생적으로 반-자본주의적일 수밖에 없는 활동인데 이걸 자본주의 플랫폼에 이식하려는 시점에서 이미 어떤 실패가 예정되어 있다고⋯ 그러니까 지금 찾아야 할 건 우리를 받아줄 새로운 사기업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유목민이 될 수밖에 없는 동인러들의 ‘기업 없이 살아남기’ 훈녀생정이 아닌가? 그런 생각.
동인지와 2차 창작 이야기 - 공수룰의 기원, 성인동의 추억
- 선생님 역시 온리전 경험자! 이제는 한글 프로그램 켜서 ‘후기’라고 쓰면 ‘여러분이 이 후기를 읽고 계시다면 제가 마감에 성공했다는 뜻이겠지요’로 자동 변환되도록 텍스트 대치를 걸어놔도 될 거 같다. 모두의 공식 문장.
- 이놈의 공수. 공수 왼른 탑텀이 대체 뭐길래 사람들을 이토록 끓게 할까요? 공수와 리버스 키워드가 던져지자마자 플로어에서 손 든 사람이 줄을 이었다. 나도 이 주제에 대해 할 말이 아주 많소. 나도나도! 나는 이러저러한 덕질을 N년간 해 온 사람인데 내 생각엔 이렇습니다. 나는 무슨무슨 업계 종사자인데 내가 생각하기엔 이렇습니다. 농담 아니라 그 대화만 두 시간 했어도 재밌었을 거 같았다. 참여한 사람에게만 녹음본 증정하고.
- 언젠가 나올 단행본 책의 프리퀄 개념으로 돌발본을 주신 것 같아 기대가 된다 👀 공수 개념의 기원도 그렇고 성인동도 나는 전혀 접해 본 적 없는 영역이라 책이 나오면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읽을 듯. 주류 문화가 아니었던 탓에 그 역사마저 파편화되어 흩어진 동인계의 기원을 누군가는 연구자의 언어로 쫓아가고 있어서 독자인 나는 헨젤과 그레텔마냥 콩고물만 주워먹고 있다. 냠냠쩝쩝.
자신들이 만들고 향유하는 1차 BL 소설은 음지문화이고 미성년자에게 유해한 포르노그래피이기 때문에 성인동과 배포전 시스템처럼 엄격하게 외부자들의 유입을 막아야 한다는 논리였죠. 2020년대 SNS에서 콘텐츠에 대해 음지양지론이 나올 때 한국에서 그 기원은 성인동으로 거슬러 간다고 봅니다.
일단 기원 얘기가 너무 흥미롭고. 또 이 음지양지도 공수 못지않은 키워드지. 여기서 해 보고 싶은 이야기가 벌써 여럿 생각나는데,- 누군가는 BL 전체를 음지라고 부르고 누군가는 성 도착 같은 특정 소재를 음지라고 부르고, 아무튼 내가 공개적 장소에서 보기 꺼려지는 모든 것을 음지로 통칭하며 쫓아내는 풍토에 대하여. 대체 ‘음지’란 뭘까요? What is 음지? 서브컬처/하위문화와는 또 다르게 구분되는 무엇일까요?
- BL = 포르노그래피라는 도식에 대해. 성적 묘사가 없는 BL은 어디로 가야 할까요? 퀴어 로맨스와 BL은 교차점이 있을 뿐 결국 다른 장르인가요? 나는 종종 내가 쓴 2차가 BL 카테고리에 아주 부합하지도 아주 벗어나지도 못했다는 생각을 했는데 (BL이라고 홍보하기엔 평균 기대치에 못 미칠 거 같고 BL 아니라고 홍보했다간 어디선가 뭇매 맞을 거 같음) 어쨌든 BL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건 성인물이고 그게 핵심이므로 성인물에 속하지 않는 컨텐츠는 한편으로 밀어놔도 괜찮은 걸까요? 이건 혹시 나만 하는 고민?
- 외부자들의 유입을 막는 건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걸까요? 동인 행사 공지에 백이면 백 쓰여 있는 ‘여성만 입장 가능’과 그에 따라오는 부연 설명 - 옛날에 무슨무슨 사고가 있었는데, 공식도 아니고 개인이 여는 행사인데 어쩔 수 없잖아 - 을 언제까지 유지해야 하는지. 적어도 이번 행사는 참가자를 여성으로 한정짓지 않았음에도 굉장히 안전하게 느껴졌다. 이런 공간에 이런 행사를 열 수 있었던 건 결국 주최자들이 소속과 실명을 밝힌 연구자여서 신뢰가 확보됐기 때문일까요? 오타쿠 개인이 이렇게 다양성 넘치는 동인 행사를 열기란 아직 불가능할까요? 그렇다면 언제 어떤 방법으로 가능해지는지?
- 아무튼 단행본 나오면 꼭 사인 받으러 갈 거예요.
서브컬처 ‘잘’ 말하기
- 헤헤 링크 새로 받았다. 인쇄해서 가져오려고 준비를 다 했다가 인쇄 비용 50만원 넘는다는 말을 듣고 급하게 QR로 가져오셨다는데 도대체 견적을 어디서 뽑으신 건가요. 누가 이분한테 소량 전용 인쇄소 좀 알려드려!
- 『마비노기』는 서브컬처인가? 발표자 분이 생각하기에 『마비노기』는 틀림없는 서브컬처 게임인데 이 주제로 논문 쓰겠다고 들고 갔더니 교수님들이 하는 말 : 그게 어떻게 서브컬처야? 대기업에서 개발해서 돈 엄청 잘 벌었던 초장수 메가 히트작이잖아! 딱히 저항적인 메시지가 녹아 있는 것도 아닌데?
- 근데 저도 마비노기가 서브컬처 게임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정확히는 ‘서브컬처 게임’이라는 장르가 따로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듯. 게임의 세계도 너무너무 넓어서, 발표자 분이 얘기했던 서브컬처 게임의 인상(플레이어들이 캐릭터와 세계관에 과몰입한다)만 따지면 문명이나 WOW도 서브컬처 게임이 되지 않나요. 친구들 다 그쪽으로 빠지면 도대체 현생으로 돌아오질 않던데.
- 접근 방식을 바꾸면 어떻겠냐는 제안은 플로어에서도 나왔었다. ‘서브컬처 게임’이 아니라 ‘게임을 서브컬처적으로 즐기는 사람들’, 특정 유형의 플레이 양상으로 바라보기.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지만 저도 매우 동의했습니다. 오타쿠는 뭐랄까, 웹툰/웹소설/만화/게임 등등을 묶어서 자 이게 서브컬처야 하고 던져주면 그걸 냠냠쩝쩝 맛있게 먹는 사람이 아니라 그게 무슨 컨텐츠든 내 눈에 맛있어 보이면 헤헤 이건 오늘부터 서브컬처야 하고 먹는 사람 같다. B급 바디 호러 영화 - 장르만큼은 아주 서브컬처였던 - 『서브스턴스』가 트위터에선 굉장히 메인스트림으로 소비된 반면 노인들만 나오는 종교 영화 『콘클라베』가 트위터에선 최신유행 오타쿠 컨텐츠로 변모하는 것만 봐도⋯.
예를 들어 <마비노기> 같은 게임에서 플레이어들이 단순히 퀘스트를 수행하는 것을 넘어 자신만의 플레이 스타일을 구축하고 게임 속에서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현실과 교차하는 정체성을 형성하는 방식은 분명하게 서브컬처의 특성을 띠고 있다. (중략) 게임은 단순한 소비의 대상이 아니라, 특정한 취향과 감수성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여 자신만의 문화를 구축하는 장이 되며, 그 과정에서 서브컬처적 정체성이 강화된다.
- 오⋯ 발표자 분이 생각하는 서브컬처의 특성은 ‘관계’에 있나요? 마비노기를 그 맥락에서 좋아했던 사람은 확실히 많은 거 같다. 사람들 그 안에서 결혼식도 올리고 그랬잖아요. 같은 취향의 친구를 만나 우정을 쌓고 내 세계까지 확장시키는 그런 면모가 서브컬처의 핵심이라면 마비노기는 서브컬처 게임이라고 할 수 있을 듯. 그게 마비노기라는 게임의 고유 특성인지 당시 유저들의 플레이 스타일인지는 생각을 좀 해 봐야겠지만.
- 그나저나 ‘게임’이라는 단어를 쓰실 때 MMORPG 게임에 국한해서 말씀하시는 거 같은데 맞을까요. 자꾸 내 스팀 라이브러리에 있는 싱글 플레이어 게임 생각하면서 읽다가 응? 하고 멈춤 (ㅋㅋ)
- 발표자 분의 이야기와는 무관하게 디스이즈게임의 일러페스 취재 기사가 생각났다. 이번 온리전에 모인 사람들은 내내 여성과 퀴어와 연대에 대해 얘기했고, 그 맥락상 ‘오타쿠 게임’은 마치 여성향 오타쿠 게임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됐지만 아마 비-오타쿠를 붙들고 오타쿠 게임에 대해 물으면 남성향 오타쿠 게임에 대한 이야기가 훨씬 많이 나올 것이다. 남성향 진영에서 생각하는 오타쿠와 서브컬처의 정의는 어디까지 우리 것과 같았고 어디부터 갈라졌는지도 한번 생각해 볼만한 주제일지도. 특히 저 기사. 읽다 보면 oh no what the fuck is this 소리가 절로 나오지만 저것이 현재 한국 서브컬처 게임’판’에 대해 말해주는 무언가가 있다고 느끼거든요. 저는 연구자가 아니라 언어화는 잘 되지 않지만⋯.
와 다 썼당!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