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지난 빅 이벤트 : 이사 준비
드디어 이사 갈 집을 구했다. 지금 살고 있는 집 다음 임차인도 정해졌고 내가 갈 곳도 정해졌으니 남은 건 실행뿐이다.
이 과정에서 이런저런 일이 많았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임대인이 개인이 아니고 법인이라, 계약 갱신 안 할 거라는 의사 전달을 반드시 내용증명으로 해야 전세보증보험 요건을 맞출 수 있었다. 그것도 계약 만료 2개월 전에 임대인이 내용증명을 “수락”했다는 증빙이 있어야 했다. 내가 내용증명을 보냈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그런데 10월에 보낸 첫 내용증명이 폐문부재로 인해 전달되지 않았다. 우체국 등기와 같은 시스템이어서 폐문부재 시 세 번까지 방문하고 그 안에 전달되지 못하면 우체국에서 일정 기간 보관하고 있다가 도로 반송하는데, 첫 번째 내용증명이 반송될 때쯤 혹시나 싶어 법인 등기부 등본을 새로 뽑아보니 대표이사(1인 법인이므로 사실상 집주인)이 나흘 전에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간 상태였다. 법인 주소는 이사 가기 전 집주소로 둔 채로. 그걸 확인한 게 11월 초였다.
내용증명을 보내는 자체도 긴장되는 일이었는데 이쯤 되자 슬슬 혼이 나가기 시작했다. 주택보증공사에 직접 찾아가서 별 걸 다 물어봤다. 혹시 대표이사 개인의 새 집주소로 내용증명을 보내도 효력이 있는지 (정답 : 없다) 만약 계약 만료 2개월 전까지 임대인이 내용증명 수락을 안하시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답 : 내용증명이 3회 이상 반송되면 법원에 공시송달을 신청할 수 있다. 나는 의사 전달을 위해 최선을 다했음을 보증하는 절차로, 공시송달을 신청해서 완료되기까지 2-3주 정도 소요. 이 경우 공시송달까지 계약 만료 2개월 전에 끝내야 전세보증보험 요건이 성립됨.) 만에 하나 공시송달을 기한 안에 완료 못할 경우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답 : 임대인과 직접 만나서 서로 계약 종료에 대해 합의했다는 서류를 쓰고 3개월 안에 제출해야 한다. 임대인이 법인인 경우 추가 제출해야 할 서류가 또 줄줄이 붙는다) 등등. 인터넷 검색하랴 내가 알아야 할 정보 정리하랴 정신은 없는데 그 와중에 혹시 모르니까 우체국 가서 내용증명 한 번 더 보내고, 그 와중에 내가 이사 갈 집은 구해놔야 하니까 매일매일 부동산 연락해서 보러 다니고, 거기에 이직 준비까지 겹쳐 미친 저글링을 돌리느라 11월 중순쯤엔 인내심도 관용도 모두 한계였다. 내 머릿속에서 임대인은 이미 뉴스에 나올 만한 전세 사기꾼이 되어 있었다.
부동산에 물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때쯤엔 부동산에 대한 신뢰도 약간 떨어진 상태였다. 부동산에선 ‘임대인이 요즘 건강이 안 좋으셔서 연락 드리기가 좀 어려운 상황’이라는 말을 여러 번 했는데, 당장 내 돈 돌려받는 게 중요한 입장에선 왜 플랜B를 구체적으로 말해주지 않고 자꾸 나 보고 양해하라는 건지 잘 이해가 안 됐다. 본인이 연락 받기 어렵다면 위임장 쓰고 대리인을 내세우던가. 본인 집주소 옮길 여력은 또 있었으면서. 그렇게 비꼬는 생각만 났다. 이 모든 일의 원인을 찾다 보니 2년 전에 갱신 계약서를 쓸 때 있었던 일까지 떠올랐다. 그건 지금 임대인이나 부동산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내가 이 집에 살고 있는 사이에 집주인이 바뀌었는데 나한텐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고 나는 갱신 계약서를 쓸 때서야 알게 되었으며 졸지에 법인 임대인과 계약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지금 생각해도 당혹스러웠기 때문에. 그때 부동산에선 ‘법인이랑 계약한다고 임차인 입장에서 달라질 건 없어요~’ 라고 했고, 이번에 집을 내놓았을 땐 ‘아무래도 법인 매물이라 시일이 좀 걸리긴 할 거예요~’ 라고 했다. 아. 다시는 법인 전세 안 해.
결과적으론 잘 해결이 됐지만, 좀 더 현명하게 대처할 순 없었을까 아쉬움도 남고, 그렇지만 이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같은 절차를 또 밟고 싶진 않다. 절대. 네버. 저는 편안한 월세로 갑니다. 차라리 돈을 내고 말지.
그 과정에서 생각했던 것 : 무언가의 전환기
이사의 in/out 이 정해지고 나자 제일 먼저 책이 눈에 들어왔다. 아… 저 책들을 어떻게 한담. 다 합치면 백 권은 거뜬히 넘을 책이 집에 있는데 저 중 무엇을 팔고 버리고 가야 할까. 적독가는 여전히 나의 지향점인가? 퀴어와 페미니즘과 온갖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도 내게 유효한가?
요즘은 모든 정체성 키워드에 물음표가 붙는다. 나는 내가 퀴어고, 아마 영원히 퀴어에 대해 말할 거라 생각했지. 하지만 정말 그런가? 나는 내가 여성과, 노동 문제와, 장애 인권과, 아무튼 그 모든 것에 관심이 있고 계속 발화하리라 생각했지. 하지만 실제로는 어떻지? 잘 다듬어진 말을 거듭해서 스스로를 well-educated 로 포장하는 얄팍한 나르시즘을 빼면 내게 무엇이 남지? 애초에 무엇이 되고 싶었지? 사회적 이슈에 하나하나 귀 기울이지 않고도 내 일상은 잘 굴러가고 있고, 사실 트위터를 들어가야 요즘 무슨 사건이 있는지도 알지 인스타그램을 메인 SNS로 쓰는 사람과 만나면 네이버웹툰에 불매 운동이 있었던 것도 지금 동덕여대에 대규모 시위가 있는 것도 모른다. 얼마 전에도 내 근황을 얘기하다 졸지에 왜 네이버웹툰에 불매 운동이 있었는지 내 입으로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돼서 (나는 그게 설명이 필요할 수도 있단 걸 자꾸 까먹는다) 약간 난감했다. 트위터 끄고 블라인드도 끄니 삶이 이렇게 평화로울 수 없는데, 인터넷 세상과 실제 세상이 너무도 유리되어 있는 나머지 나는 이 둘 중 어디가 내가 돌아가야 하는 곳인지가 의문이다.
매일매일 네이버 부동산에 들어가 오늘은 어떤 매물이 올라왔을까 검색하며 돈에 대한 생각도 많이 했다. 어쩌면 지금 내게 필요한 책은 <퀴어 이론 산책하기>나 <딕테>가 아니라 토스에서 나온 <더 머니 북>이 아닐까… 한국에 계속 살 거라면 30대 지나기 전에 내 집을 장만하고 싶다. 그걸 정하려면 정말로, 진실로, 해외에 나갈 생각이 없는지 다시 한번 고민해볼 시기기도 하다. 이런 생각을 반복하다 보면 모든 게 갈림길이다. 내년이면 9년차가 되는, 곧 10년차를 앞둔 (미친 거 아냐? 10년차면 마법도 쓸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내 커리어의 방향, 회사에 어디까지 기대하고 나는 어디까지 노력할지, 무엇을 내가 포기할 수 있는 가치로 두고 무엇을 나의 긍지로 둘지.
무엇을 흘려보내고 무엇을 갖고 갈지. 요즘은 다 그 고민이다.
12월에 하고 싶은 일 : 바다 보기
실은 한 달 전부터 너무너무너무너무 바다 보러 가고 싶었는데 집 보러 다니느라 여행 일정을 잡을 수 없었다. 3박4일씩 바다 가서 멍 때리고 책 읽다가 멍 때리는 걸 전혀 하지 못해서 지금 거의 금단현상에 시달리고 있는데…
이사 프로세스의 가장 큰 문제가 끝났으니 이제 별다른 걱정은 없지만 여전히 회사 일이 아주 바쁜 시기인데다 반드시 오프라인으로 참석해야 하는 면담, 회식, 기타 모임 등등이 중간에 계속 끼어 있어서 20일 이전까지는 계속 동네에 붙어 있어야 할듯 싶다. 그래서 최대한 이사 준비 미리 끝내놓고, 이사 가기 전 동네 추억 탐방도 겸사겸사 끝내놓고, 퇴근 후에는 스팀 가을 세일도 열심히 즐긴 다음, 크리스마스 주간에는 모든 걸 내려놓고 바다 보러 가는 것이 현재의 목표.
다사다난했던 하반기가 끝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