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앓듯이 잠을 잤다. 침대에 꼼짝않고 누워 유튜브 숏츠를 보다가 창밖이 어둑해질 때쯤 불을 켰다. 핸드폰 배터리가 10% 미만으로 떨어져서 충전기에 꽂은 다음 다시 잠을 잤고, 그러다 눈을 떠서는 다시 숏츠를 보다가 배달 음식을 시켜 밥을 먹었다. 이대로 주말을 지나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에 비척비척 일어난 건 새벽 두 시였다. 설거지를 했고 빨래를 걷었고 쓰레기를 버렸고 여름옷 정리를 했다. 해가 환히 떠서야 다시 잠들었고 정오쯤 일어났다. 뭐라도 하겠다고 씻고 책상 앞에 앉았다가 너무 졸려서 낮잠을 잤다. 일어났을 땐 해가 지고 있었다. 월요일에 있을 독서모임에 대비해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다 읽었다. 밀려 있던 카톡을 읽었다. SNS 알림도 읽었다. 언제 트위터로 돌아올 거냐는 트친의 답글을 다시 읽었다. 잃어버린 출발점을 다시 생각했다.
가까운 친구들에게 들은 말을 여러 번 곱씹었다. 부모님께 들은 말도 계속 생각했다. 취미 활동도 아니고 회사를 다니는 건데 너 좋은 일만 할 수 있니, 하는 말과 하지만 낭만이 없잖아, 라는 말 사이의 간극을. 난 무엇을 바랐고 어디서 지쳤을까. 생각을 거듭하고 거듭한 끝에 문득 타협이라는 키워드가 머릿속을 스쳤다. 내가 하는 일은 처음부터 타협이 본질이다. 예쁘고 오밀조밀한 화면을 만들고 싶어하는 디자이너에게 애플의 휴먼 인터페이스 가이드라인을 내밀며 설득을 한다. 버튼 사이즈는 최소 44x44여야 한다고 여기 써 있는데요. 하지만 화면에 표시해야 할 정보가 너무 많아서 30x30이 최대라고 하면 이미지는 30x30으로 보여주되 터치 영역은 44x44로 확보해 놓으며 혼자 뿌듯해 한다. 그만하면 잘 타협한 편이다. 사용자를 불편하게 만들 걸 뻔히 아는 디자인, 기획, 법을 완벽하게 준수했다고도 완벽하게 위반했다고도 말할 수 없는 스펙의 경계 어드메에서 나는 ‘정말 꼭 이래야 하는 건가요’를 한번 물어본다. ‘네.. 어쩔 수 없을 거 같아요’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그 답변에서 두 가지를 이해한다. 아. 나는 지금 비겁하게 굴고 있다. 어쩔 수 없다는 답이 돌아올 걸 알면서, 상대도 딱히 내켜서 이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님을 알면서 나를 방어할 핑계를 만들고자 물어본 거다. 그리고 나는 핑계만 주어지면 기꺼이 타협할 수 있는 사람이다.
4년 전쯤 CTO와의 대화 자리에서 ‘요즘 악플 때문에 힘들어하는 작가님들 많던데 우린 왜 댓글 차단 기능을 안 만드나요 일주일이면 만들 텐데’ 하고 물었을 때 CTO가 ‘그것도 결국 우리 서비스가 인기 있다는 증거일뿐’이라고 답했던 일을 나는 아마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CTO 개인에게 실망한 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 말을 들은 즉시 내 머릿속에 떠올랐던 후속 질문이 훨씬 처참했다. ‘그러다 그분들 중 누가 극단적인 선택이라도 하면 그때 저희가 느낄 책임감은요?’ 그런 순간은 이후에도 많았다. 아동 보호 법안에 관련된 첫 기획서를 받았을 때 우리끼리 우스갯소리로 그런 말을 했다. 만약 우리가 코드를 잘못 짜서, 아니면 일이 잘못 흘러가서, 이 법안의 국내 첫 위반 사례로 우리가 꼽히며 회사 연간 수익의 4%와 2천만 유로 중 더 높은 쪽을 과징금으로 내게 되는 순간 이 코드 작업했던 우리의 이름은 한국 IT 업계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거라고. 마치 예전에 실급검 팀 담당자들이 법원에 내내 들락날락거렸듯. 하물며 아동 보호 법안인 만큼 기사 제목도 자극적으로 뽑혀 나올 게 아닌가. 본인이 짠 코드가 어떤 의미인지 다 알고 만드셨죠, 하는 질문을 받는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답은 네, 밖에 없을 테고. 하지만 그중 가장 처참한 건 거기까지 생각하고도 팀원들과 우스갯소리나 할 뿐 여기까지 일을 해 온 나 자신이다. 어찌나 타협과 수긍에 능한지 나는 아직도 그 대대적인 불매운동을 촉발시킨 게 고작 <이세계 퐁퐁남>이라는 걸 믿을 수 없다. 그럼 <외모지상주의>와 <뷰티풀 군바리> 연재할 땐 불매운동 왜 안 일어났지.
차라리 철저히 업무로 대했다면 괜찮았을 것이다. 트위터가 아니라 인스타그램을 하는 사람이었으면 나았을 테다. 깊게 생각 안 하는 쪽이 좋았을 것이다. 애초에 클라이언트 개발자가 아니었다면? 그때 그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그 결정을 하지 않았다면? 하지만… 너무나 많은 ‘하지만’이 따라붙는다. 하나하나 물결을 거슬러 기원부터 문장으로 풀어내면 다 모아 책을 낼 수도 있을 거 같은 기억들. 매듭. 이미 한참 전에 지나온 삶의 여러 순간에 ‘하지만’이 있다. 생각이 어찌나 복잡하게 엉켰는지 옛 친구가 간만에 꿈에 나왔다. 나이든 모습은 모르기에 십 대의 앳된 모습으로. 원래보다 매우 미화되었을 얼굴로. 그 친구의 등장은 또 내가 지나보낸 여러 이상을 상기시킨다. 나는 무엇이 되고 싶었나. 지금은 어떤 순간인가. 질문을 해결하는 방법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질문에 답을 내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더 이상 그 질문을 필요치 않는 내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매듭을 풀어야 하는 순간일까 매듭을 잘라야 하는 순간일까.
이제는 누굴 그리워하기에도 시간이 많이 흘렀다. 벌써 11월이다. 부디 지난 한 달보다 나를 덜 부끄러워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