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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Aug 24, 2024

우리 회사는 8월이 끝나가는 지금 아직도 2024 연봉협상을 시작하지 못했다. 연협을 못했다는 이슈에서 내가 스트레스를 받는 부분은 경제적인 면이 아니다. 얼마 전에 엄마랑 통화하면서 우리 아직도 연협 못해서 기분이 좀 그렇다고 말했더니 엄마가 ‘아니 원래도 적지 않게 받았잖아..’ 하셨다. 완전 맞는 말입니다. 지금 받는 연봉에 저는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저를 힘들게 하는 건 이 미뤄지는 연협으로 인해 비관주의 공회전을 하는 회사 분위기입니다. 회사에서 긍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이 전멸하다시피 했어요. 와 우리 수고했다~ 라던가,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게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이런 측면에선 보람이 있죠? 라던가, 우리가 하는 일에서 대단한 당위까진 찾지 못해도 같이 일하는 사람들끼리는 으쌰으쌰가 되어야 하는데 요즘은 정말 그게 힘들다. 회식을 가도 티타임을 해도 ‘저희 진짜 연협 언제할까요? 회사 분위기가…’ 를 벗어나지 못한다.

나는 이 일이 처음부터 보상 규모의 문제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웹툰은 그동안 많이 변했다. 약 4년 전까지만 해도 네이버웹툰은 뭐랄까.. 만화가 좋아서 모인 젊은 덕후 청년들 같은 회사였다. 커리어 상승에 관심 있는 사람들보단 만화 좋아하는 사람들이 주가 되는 곳이었고 운영되는 분위기도 복작복작 사이좋은 구멍가게 느낌이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상장 준비에 도입했던 약 3년 전부터 회사엔 ‘웹툰은 잘 모르지만 여기가 요즘 성장하는 회사라고 들어서’ 온 사람들이 아주 많이 조인했고, 코로나의 흐름을 타고 또 아주 많이 빠져나갔으며, 돈 잘 벌어야 하는 회사의 면모를 조금씩 갖춰나갔다. 그런 변화는 나를 비롯한 고인물 직원들을 조금 슬프게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제까지고 회사가 사이좋은 복작복작 구멍가게에 머물러 있기를 바랄 수도 없으니까.

하지만 그건 한때-구멍가게를-경험해본, 어쨌건 이 회사 안에 아는 사람이 있고 나름의 추억도 있는 고인물 직원들이나 누릴 수 있는 다소 사치스러운 감정이기도 했다. 코로나 기간엔 정말로 많은 일이 있었다. 나 또한 그 시기에 입사했던 사람과의 갈등으로 고생했고 그런 일은 나한테만 일어나지도 않았다. 꽤 많은 사람이 영문을 모르고 참았고 외로워했고 위태롭게 버텼다. 게다가 ‘우리 상장해야 돼’ 핑계로 업무 강도는 얼마나 올라갔는지. 개발자는 아마 회사 전체에서 가장 편하게 일한 직군일 것이다. 기획자들은 주말도 없이 일했다. 너무 힘들어서 회의 끝나고 이유도 없이 울었다는 글들이 블라인드에 조금씩 올라오기 시작한 게 작년쯤이었다.

그리고 4년 전의 우리 회사가 동네 구멍가게였다면, 이 회사의 창업자이자 현 대표인 준구님은 아주 완벽하게 구멍가게 사장님 스타일이었다. 능력 관점에서가 아니라 본인이 선호하는 스타일이. 그는 준구님보다 준구 형으로 불리고 싶어 했고 모든 직원에게 친근한 사람이고 싶어 했고 실제로도 그런 사람이었다. 고인물 직원들에게는. 나 역시 손에 꼽을 정도긴 하지만 준구님과 같은 자리에서 대화했던 경험이 있고 인간적으로 친근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인간적으로 좋은 구멍가게 사장님과 직원들이 기대하는 전문경영인의 모습 사이에는 분명한 괴리가 있고 언젠간 그 부분을 잘 풀어가셔야 할 거라고 생각했을 뿐.

그러나 내가 정말로, 우리 진짜 멀리 왔다고 생각했던 건, 대표님이 우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봤을 때였는데… 꽤 최근 일입니다. 노조 성명 -> 준구님 발표 -> 노조 성명 -> 준구님 발표의 릴레이가 근 몇 달간 계속 이어졌고 우린 아이고이거언제끝나나 하며 또 준구님 발표를 들으러 갔는데 거기서 글쎄… 그분의 발표를 듣기 위해 오프라인으로는 백 명 가까운 사람이, 화상으로는 몇 백명에 가까운 사람이 접속해 있는 상황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회사 생활하며 처음 겪어보는 일에 난 너무 당혹스러웠고, 약간은 동정했으며, 하지만 역시 당혹스러웠다. 저한테 그 분은 이름난 유튜브 채널에 자주 출연해서 입 터는 아저씨인데 가끔 회사에서도 마주치고 서로 안면도 있는 그런 사람이었거든요. 근데 화상 회의 접속해놓고 내 업무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반-연예인의 눈물 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야 이거 뭔 일임?’ 하는 별로 좋지 않은 익명 네티즌 자아와 ‘이럴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어’ 하는 아야나미 레이 자아가 동시에 나오지… 이해는 돼요. 늘 인상 좋은 구멍가게 아저씨로만 불리다가 이런 강도 높고 원색적인 비난 처음 받아보셨겠지. 그분도 애 쓰셨겠죠. 심정은 진짜 백분 이해하는데 뭐랄까 나이만 먹고 철이 약간 덜 든 사람을 보는 느낌도 들고… 난 그래도 약간은 안 됐다는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현재 블라인드에서는 ‘즙 짜는’ 키워드로 밈이 돌아다니고 있다고 해서 와 우리 회사도 정말 갈때까지 갔구나 싶었다는.

상장 보상은 그냥 도화선이었던 거 같아요. 원래 보상을 50만원 준다고 했던 걸 100만원 준다고 이 불길이 사그라들 것인지? 2024 연봉협상을 올해 연말까지 끌고 가게 생겼는데, 연봉을 전직원 일괄 20%씩 올려준다고 하면 “오 회사가 드디어 우리 고생을 좀 알아주는군~” 하고 분위기가 괜찮아질까요? 너무 멀리 왔다니까 이거.. 이젠 그냥 자기 화났던 감정 풀고 싶어서 화내는 사람도 있고, 그냥 일하기 싫은데 회사 분위기 때문에 일하기 싫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엉망진창입니다 정말.

세월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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