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는 봤나 스위니 토드
잔인한 운명의 이발-사.
지난 여름 국립극장에서 연극 『햄릿』을 보고 강필석 배우님에게 관심이 생겼다. 일단 그 작품 자체가 올해 내 문화생활 원탑이었다. 단순히 취향에 맞았던 정도가 아니라 그 작품으로 내 어떤 영역이 재구성된 느낌. 그러니 그 어마어마한 작품에서 주인공 햄릿을 연기한 사람에겐 당연히 관심이 갈 수 밖에 없었다. 이미 『썸씽 로튼』 프레스콜 영상, 『번지점프를 하다』 넘버 등 찾아볼 수 있는 영상 자료는 다 찾아봤다. 그러다 올 연말 『스위니 토드』에 강필석 배우님이 토드 역으로 출연하신다기에 바로 예매했었고, 오늘 보고 왔다.
강필석 배우님이 출연한다는 것만 확인하고 그 외엔 아무 것도 찾아보지 않아서 줄거리조차 몰랐는데 처음엔 『레 미제라블』의 장 발장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아버지와 살아남았되 위태로운 딸, 그 딸을 사랑하는 순수하고 정열적인 청년이 등장한다는 점. 아버지와 청년은 모종의 연대 관계를 갖고 있으며 전반적으로 사회 하위 계층의 서사를 다룬다는 점 등등.
그러나 1부까지 보고 나자 아 이게 장 발장은 장 발장인데 미리엘 주교도 없었고 운도 따라주지 않은 장 발장이구나… 대조군을 놓고 보니 빅토르 위고가 그린 장 발장은 인간찬가의 아이콘이었네 하는 생각이 확 들었다. 이렇게 찬 물 확 끼얹는 작품을 보고 나면 인간 찬가를 인간 찬가로 인식하지 못한채 지나 온 순간들이 오싹하게 느껴진다. 그러니까, 사회의 하층 계급을 떠올리는 상상력이 고작 『레 미제라블』에 멈춰 있던 나 자신이라던가.
복수가 메인 테마라는 점에선 『햄릿』 과도 닮은 면이 있어서 좀 묘했다. 강필석 배우님 올해 내내 복수극 주인공만 하셨네… 물론 햄릿은 클로디어스를 죽인다는 쉬운 답을 눈앞에 두고도 철학적으로 고민하는 반면 토드는 아주 쾌속하게 타락하지만. 근데 또 이렇게 비교하기엔 햄릿은 어쨌거나 왕자란 말이지. 햄릿이 클로디어스를 죽일지 말지 고민할 수 있는 건 그가 언제나 클로디어스를 만나러 갈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고, 토드는 복수의 대상을 만나기 위해서 운에 기대어 기회를 만들어야 하는 쪽이니까. 사실 『햄릿』은 좀 과할 정도로 주인공 햄릿의 고뇌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그게 결국 ‘너는 고뇌할 자격이 있다’는 극 전체의 승인인데 토드는 그런 승인을 받는 캐릭터가 아니다. 비록 극 제목이 『스위니 토드』 에 앙상블은 끊임없이 토드에 대한 노래를 부르고 있지만 뭐랄까, 일련의 사건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토드의 이름을 대충 가져다 썼을 뿐 이 사건들 속에서 토드의 역할은 별로 크지 않다. 그는 제일가는 가해자가 아니고 제일가는 피해자도 아니다. 이 사건을 시작한 건 그가 아니었고 맨 마지막에 서있는 사람도 그가 아니다. 그런데도 사건은 ‘스위니 토드’로 기억된다. 그래서 더더욱 토드는 진지하게 여겨지지 못한다. 그의 복수는 우스꽝스럽다.
요즘 의도치 않게 이런 복수, 비극, 잔인한 운명 등으로 불릴 만한 컨텐츠를 많이 읽고 있어서 (RRR 본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비극 이야기에 침잠했는지 진짜 모르겠다) 가볍게 정리가 안 된다. 트위터 찾아보면 다른 사람들은 김지현 배우의 러비 부인과 강필석 배우의 토드가 케미가 좋았네, 무대 실수가 약간 있었는데 그게 너무 웃겼네, 하고 행복해 하는데 나는 아직 그럴 준비가 안 됐어. 실존했던 이야기도 아니고 고작 빅토리아 시대의 괴담일 뿐인데 난 왜 이렇게 과몰입을 해서 토드의 잔인한 운명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