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무성애자로 정체화한 이후에 연애를 해 본 적이 없다. 마음 가는 사람이 생겨도 마음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고백할 때나 고백을 받았을 때 “실은 내가 무성애자인데⋯.” 라고 설명해야 할까? 이제 겨우 사귀자는 이야기가 나왔을 뿐인데 성관계에 대해 얘기하는 건 너무 이른 거 아닐까. 그보다 고백이라고 하는 최고로 로맨틱한 순간에 나는 무성애자 나무위키 항목을 내밀어 가며 내가 이런 성향의 사람이라고 구구절절 설명해야만 하는 걸까.

하지만 내가 무성애자임을 밝히지 않고 연애를 시작하면, 언젠가 성관계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상대방이 사기를 당했다고 생각하진 않을까? 유성애자에게 있어 성관계는 연애의 최고 정점이자 주요 목적 중 하나인 것 같은데 난 그게 전혀 성립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사전에 말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결정하기 힘든 것 투성이다.

“성에 개방적인” 라는 표현이 성관계를 긍정하는 방향으로만 쓰이는 게 안타깝다. 물론 그동안 억압되어 있던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과 성향에 대해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도록 바뀐 것은 중요한 변화지만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고, 하기 싫다고 표현하는 사람의 말도 군말없이 받아들여지도록 바뀌었으면 한다. 내가 성관계를 싫어한다고 해서 “아직 어려서” “뭘 잘 몰라서” “경험이 부족해서” “상대방의 스킬이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니며 내가 관계를 거부하는 것은 “당신의 스킬이 부족해서” “준비가 안 되어서” “덜 사랑하기 때문에” 가 아니다.

나한테 있어 “사랑하는 사이라면 당연히 섹스를 해야 한다”는 말은 “사랑하는 사이라면 당연히 서로가 화장실에서 볼 일 보는 모습까지 사랑해야 한다”는 말과 비슷하게 들린다. 글쎄 진짜 어마무시하게 사랑하면 그것까지 사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나한텐 불가능한 얘기라..

근데 심지어 연애에서 섹스는 필수요소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건 마치 “연애를 하면 정기적으로 서로가 화장실에서 볼일 보는 모습을 관람할 의무가 있어서 이를 진심으로 즐겨야 하며 이것을 진심으로 즐기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진정한 증거” 라고 말하는 걸로 들린다. 나한테 왜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