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쯤 애니메이션 오타쿠라고 아무 망설임 없이 나를 소개할 수 있을까.

친구들은 이미 내가 틈만 나면 애니를 보고, 영화관에 가서 영화보다 애니 극장판을 더 많이 본다는 것도 알고 있다. 회사에선 같은 팀에 애니메이션을 즐겨 보는 분이 있어서 그 분과 주로 얘기하고, 다른 분들도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정도면 가능한 수준의 표출은 다 한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갑갑한지.

가끔 친구들이 ‘너도 러브라이브 같은 거 보냐’고 묻는 게 참 불쾌하다. 러브라이브 같은 거가 대체 뭔지. 정말 내가 러브라이브를 좋아하는지가 궁금한 게 아니라 내가 자기들 기준으로 어느 정도 씹덕인지를 판단하고 싶은 것 같아서 뭐라고 대답을 해야 좋을 지 모르겠다. 내가 페이스북에서 애니 관련 게시글에 댓글을 단 게 자기 타임라인에 떴을 때 그걸 캡처해서 나한테 보여주며 낄낄거리는 것도. 그게 농담거리라고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나에 대한 조롱처럼 보인다. 나한텐 영화나 락 페스티벌이나 애니나 아무 차이도 없는 아주 평범하고 즐거운 취미일 뿐인데, 왜 그에 대해 남들에게 이렇다 저렇다 하는 판단을 받아야 하는 건지.

이런 부분을 일일이 신경 쓰고 있는 나 자신도 싫다. 오늘은 마마마 극장판을 메가박스에서 보고 왔다. 제대로 비틀어 놓은 마법소녀 이야기가 참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도저히 친구들에게 하게 되지는 않는다. 내가 만약 영화를 봤다면, 영화에 아무 관심 없는 친구에게도 얼마든지 재잘거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영화 이래서 좋고 저래서 짱이었어 너도 한 번 봐봐. 안 보면 할 수 없고. 하지만 애니메이션 이야기를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내가 애니 오타쿠라는 걸 아는 친구들도 그저 “그런 취미도 있을 수 있지”라고 표면적으로 받아들일 뿐 단 한 점의 편견도 없이 내 얘기를 들어줄 것 같지가 않다. 이 이상으로 특이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굳이 오타쿠로서의 정체성이 아니더라도 나는 이미 지니고 있는 소수성이 많다. 남자가 대다수인 분야에서 생물학적 여자고, 사랑하는 사이엔 섹스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세상에서 무성애자이며, 인간을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하는 세상에서 논바이너리 젠더를 갖고 있다. 아직도 웹사이트 가입할 때 성별을 고르시오 1.남자 2.여자가 나오면 숨이 막힌다. 어쩔 땐 이걸 다 안고 사는 게 벅차서, 버릴 수만 있다면 이 정체성들을 버리고 나도 메이저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근데 그 와중에 오타쿠이기까지 해.

나는 언제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당당하게 내세워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