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등학교 때 읽었던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지금껏 내 인생의 책이었다. 머릿속에 지진이 났다고 느꼈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진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프라두는 페르난두 페소아의 사상에 기반한 인물이라는 설명을 인터넷에서 보고 꽤 오랫동안 페소아 덕질을 했다. 물론 덕질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당장 내일의 계획만 해도 페소아와 관련된 무언가를 번역하는 것이다.

내가 이해하는 페소아는 대략 이렇다. 두 명의 사람이 같은 야경을 보고 있다고 하자. 한 사람은 도시의 풍경에 관심이 많아서 야경을 보면서 빌딩숲의 화려함에 감탄하고 있다. 다른 한 사람은 자연 풍경에 관심이 많아서 야경 안에서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을 보며 감탄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동시에 “야경 정말 멋지다!”라고 말했다.

이 때 이 두 사람은 서로 통했다고 생각할 테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관점에서 ‘멋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두 사람이 ‘멋지다’라는 어휘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다를 수도 있다. 심지어 두 사람의 위치가 정확히 같지 않기 때문에 물리적으로도 두 사람은 같은 풍경을 보고 있지 않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야경에 대한 대화를 이어나갈 것이다.

페소아가 생각하는 사람들간의 대화는 다 이런 식이다. 우리는 타인과 대화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죽은 언어다. 상대방에게 전혀 닿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글이 아닌 말로 이어지는 대화가 더더욱 이런 허무를 많이 지니고 있다.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과정을 우리(와 페소아)는 늘 갈망하지만, 그것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또한, 도시의 풍경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야경의 빌딩숲에 감탄했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그 사람은 이전에도 빌딩숲을 주의 깊게 봐왔을 것이고 마음 속으로 상상한 적도 있었을 것이다. 즉 빌딩숲은 이미 그 사람 안에 내재되어있던 개념이다. 그런데 방금 본 야경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로운 풍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빌딩숲의 화려함밖에 보지 못했다. 별들의 아름다움은 놓치고 말았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결국 사람은 자신 안에 내재되어있던 것밖에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새로운 책을 읽어서 뭔가 깊은 깨달음과 성찰을 얻었다고 생각해도, 사실 그건 내 안에 내재되어있던 개념이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멀리 여행을 떠나 온 후 다양한 경험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 역시 내 안에 내재되어있던 것이다. 오히려 그 여행에서 진짜로 새로운 것, 내 안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은 그게 언제 지나갔는줄도 모르고 놓치고 말았을 것이다. 페소아가 자신은 일곱 대륙에서는 어떤 새로움도 느끼지 못하며, 진정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건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여덟 번째 영역이라고 말한 것은 아마 이런 맥락일 것이다.

열여덟에서 열아홉으로 넘어가던 즈음부터 지금까지 나는 페소아의 생각에 깊게 감응해왔다. 마음에 와닿는 문장을 다이어리에 적고, 블로그에 또 적었다. 문장을 받아들이는 게 힘에 부칠 때 쯤 아무 페이지나 골라서 펼치면 거기엔 늘 또다른 감동이 있었다. 페소아는 어차피 남들과의 대화는 허무함 투성이며 우리는 절대 우리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한 이후로 끊임없이 자기 안으로 파고 들었는데, 이런 자폐적인 성향은 나와도 꽤 맞는 구석이 많았기 때문에 오랫동안 그의 문장들을 사랑해왔다.

하지만 열여덟살의 겨울 이후로 리스본행 야간열차만큼 나를 울리는 책을 만나지 못했다는 점은 나를 슬프고도 불안하게 만들었다. 쉴틈없이 책을 붙들었고, 또 그 책들에 대한 감상이나 마음에 드는 문장도 꾸준히 남겨왔지만 그건 책이 나를 울려서가 아니라 그렇게 게라도 노력하지 않으면 나 자신이 볼품없는 인간이 되어버릴 것 같은 불안함 때문이었다. 나는 어쩐지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완독한 시점을 마지막으로 내가 정신적 성장을 전혀 이루지 못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다, 어제 한창 이어지던 독서 중간에 문득 느낌이 왔다. 아, 나 이제 페소아에서 졸업할 수 있을 것 같아.

이건 정말 ‘느낌’이라, 정확히 어떤 과정과 논리를 거쳐 여기에 이르렀는지는 나 자신조차도 설명하기가 힘들다. 그러니까 혹시 이 느낌을 잊어버린 과거의 내가 글을 본다면 참 미안하다. 굳이 이유를 찾아 붙이자면 “세상엔 삶의 한 가닥을 가르쳐줄 고전이 너무 많고, 난 아직 그 중에 절반은 커녕 10퍼센트도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인데, 글쎄. 실은 그냥 때가 된 게 아닐까 싶다. 꾸준히 방문 도장을 찍다 보면 어느새 게임 보상이 많이 쌓여있는 것처럼, 그동안의 고민의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시기가 된 게 아닐지.

물론 첫 문단에서 썼다시피 내일은 페소아에 대한 번역을 할 것이다. 하지만 쫓기던 나로서가 아니라 조금은 졸업한 나로서 페소아를 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