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일본어 시험을 준비하다가 3집과 신년 콘서트 소식을 완전히 놓쳐서 티켓팅에 실패했었다. 그런데 프라이빗커브에서 신년 콘서트 티켓을 상품으로 댓글 이벤트가 열려서 내가 언제 처음 고상지 언니의 공연을 봤으며 무엇이 좋은지 이번 앨범에선 어떤 곡을 가장 좋아하는지 열성을 다해 댓글을 작성했고, 운 좋게 당첨이 돼서 무료로 이번 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다.

배정 받은 자리는 A17, A18 이었다. 맨 첫 줄의 맨 왼쪽 자리라서, 역시 이벤트 추첨에 명당 자리를 주지는 않는구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엄청 좋은 자리였다. 단이 아예 없는 무대여서 첫 번째 줄에 앉으니 고상지 언니와 세션 분들과 눈높이가 같았다. 덕분에 연주와 퍼포먼스 둘 다 자세히 다 볼 수 있었다.

연주했던 곡들 리스트는 (기억 나는 대로 서술)

Astor Piazzolla

  • Double Concerto For Bandoneon & Guitar 의 3악장 Tango
  • Libertango
  • Chin Chin
  • Balada para un Loco
  • The 4 Seasons Of Buenos Aires 의 1번(봄)과 4번(겨울)
  • Adius Nonino
  • Por Una Cabeza

고상지 1집 Maycgre 1.0

  • Red Hair Heroin
  • 빗물 고인 방
  • 홍제천의 그믐달
  • A Los Amantes

고상지 3집 Tears of Pitou

  • Adventure(Red 버전)
  • 마지막 만담
  • 헌터x헌터 시리즈(Fuga for the three, 무한의 유피, 성층권) 연이어 연주
  • 14 years after
  • 제빵사의 아침

에바 메들리

  • 3집의 ‘99.082%’ + 에바 ost +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의 ‘출격 노틸러스 호’ + 1집의 ‘출격’

악기 세션은 피아노, 비브라폰, 일렉 기타, 베이스, 첼로, 비올라, 바이올린 넷, 드럼 정도가 있었고 통기타가 나오는 곡이 딱 한 곡이 있었고, 관악기가 등장하는 노래가 두 개쯤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댄서 분이 나와서 곡에 맞춰 공중에서 퍼포먼스도 하셨는데, 보는 내내 플라잉 요가가 생각난다는 점과 세션을 봐야 할지 댄서를 봐야 할지 헷갈렸다는 점만 제외하면 아주 멋있었다. 원래 탱고도 하시던 분이라는데, 다음 콘서트에선 탱고도 보여주시면 좋겠다.

3집에서 가장 좋아했던 곡이 ‘마지막 만담’과 ‘성층권’이었는데, ‘성층권’은 아주 조금 별로였다. 초반에 반도네온이 멜로디를 이어가다가 분위기가 고조되고 일렉 기타가 그걸 이어받는 부분을 좋아했는데, 악기가 너무 많아서인지 일렉 기타의 소리가 임팩트 있게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음원으로 들으면 일렉 기타의 독주처럼 들릴 만큼 락 느낌이 짙은데, 기타리스트 분이 너무 점잖게 연주를 하셔서 시각적인 면에서 조금 김빠졌던 거 같기도.

하지만 ‘마지막 만담’은 진짜 좋았다. 3집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곡이기도 하고, 안 그래도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곡인데 라이브에서 들으니 더 감정이 고조돼서 그런지도. 음반에 실린 버전으로 한 번 들려주셨고 마지막에 편곡된 버전으로 한 번 더 들려주셨는데, “애니메이션에서 영웅이 마지막에 멋있는 일을 하러 떠날 때, 뒤를 돌아보지 않고 손을 흔드는 듯한” 느낌으로 편곡하셨다고. 처음 멜로디를 관악기가 연주하고, 중간에 드럼이 엄청 빡세게 들어갔는데 들으면서 정말 눈물 흘릴 뻔했다. 이 버전 실어서 한 곡짜리 싱글 음반 내시면 저 살 거 같아요…

별로 기대했던 곡이 아닌데 좋았던 건 ‘14 years after’. 앵콜곡으로 들려주셨는데 상지 언니가 곡 소개하면서 감정을 드러내실 때 왠지 같이 울컥하기도 했고, 이게 진짜 이 콘서트의 마지막 곡이라는 감성에도 적합했던 것 같다. 마지막에 모든 악기들이 같이 합주하는데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운 웅장함에 감동했다.

그리고! 피아졸라의 Double Concerto 3악장. 탱고+재즈 장르의 공연도 여러 번 다녔고 음반도 여러 장인데 전혀 처음 들어보는 곡이었다. 굉장히 마이너한 곡이지만 좋은 멤버들끼리 만났으니 연주해보고 싶어서 고른 곡이라고 설명해 주셨는데, 내 기억에 관객 호응이 좋았던 곡 베스트 3안에 들어가는 것 같다. 일단 다른 곡들에 비해 꽤나 길었는데 (6분 37초) 지루하기는 커녕 내내 긴장을 놓지 못했을뿐더러 세션 분들의 연주에 우리까지 같이 빨려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콘서트 보면서 계속 “오늘은 누가 뭐래도 이 곡이 제일 좋았다” 생각하고 있었을 정도. 물론 막판에 마지막 만담 편곡 버전에 에바 메들리에 14 years after 까지 듣고 나선 순위를 매길 수 없게 되었지만.

그 외에도. 상지 언니의 숨길 수 없는 묘한 화법과 (전혀 웃긴 얘기를 하지 않았는데 모두가 웃게 되는 화법) 센스 있게 BGM 깔아주시던 피아노, 그리고 “녹음 중에 자기 때문에 녹음비를 백만원이나 날렸다고 그러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다”라고 너무나 진지하게 말씀하시던 퍼스트 바이올린 ㅋㅋㅋㅋㅋㅋ 등등이 요번 콘서트의 묘미였다.

이제 이걸로 새해 시작할 파워를 좀 받았으니, 혼자 여행 가기 전까진 이 파워로 버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