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스템에는 타당한 점과 잘못된 점이 존재한다. 당연한 말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의외로 이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는 않다. 가령 민주주의도 잘못된 점이 있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신분 제도와 노예 제도가 과거의 유물이고 지금 우리가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 민주주의가 이전의 둘보다 모든 면에서 더 나은 제도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일까.

2099년 세계 대공황이 발생하여 대부분의 국가가 무너졌지만 발빠르게 쇄국 정책을 펼쳐 유일하게 국가로서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일본. 그리고 그 일본을 지탱하고 있는 시빌라 시스템이 이 만화의 배경이다. 시빌라 시스템은 각 개인의 “범죄 계수”를 측정할 수 있어서, 수치가 어느 기준을 넘어서면 잠재범으로 취급되어 바로 감옥에 갇히거나 즉시 사살도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이 수치를 통해 모든 국민의 직업군이 결정되며, 조금이라도 수치가 높아지면 수치를 낮추기 위한 치료를 받아야 한다.

내 눈엔 아무리 봐도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빅 브라더와 다를 게 없는 시스템이지만 애니메이션은 “이 시스템이 잘못됐다” 라는 쉽고 간단한 결론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1기 마지막 화에서 주인공 아카네는 시빌라 시스템에 대해 “완전히 상반된 감정적 반감과 이론적 평가”를 갖고 있다는 말이 나오는데, 물론 이미 사회에 뿌리 내린 시빌라 시스템을 어떻게 할 힘도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어쨌든 주인공은 시스템의 이론적인 완성도에 대해서는 높은 평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장면을 이해하기가 꽤 힘들었기 때문에, 사실은 주인공 아카네도 이미 시빌라 시스템이 지배하는 사회에 물들어서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하는 상태인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었었는데 이 의문이 2기에서 풀린다. 아카네가 엄청난 강철멘탈의 소유자라서 이 사태를 그나마 잘 받아들인 경우고,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라는 걸 2기에서 설명해준다.

1기의 주제가 대략 (시빌라 시스템은 결코 완벽하지 않다 + 시스템 이전을 기억하는 세대의 이야기) 였다면, 2기의 주제는 (시빌라 시스템이 자신의 결점을 극복해나가는 과정 + 시스템 이전을 전혀 겪은 적이 없는 세대의 이야기) 다. 1기에서 소극적이고 서툰 신입의 모습을 보여 줬던 주인공 아카네는 2기에서는 전혀 몸을 사리지 않는다. 이미 시빌라 시스템의 진실을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한 발 더 앞서 생각할 수 있지만, 믿고 의지할 수 있었던 멘토 격의 동료들은 1기에서 다 사라졌기 때문에 혼자서 고군분투 하는 캐릭터가 되어 버렸다.

반면 2기에서 새로운 주인공으로 등장한 시모츠키는 “나한테 피해만 안 오면 된다”는 마음가짐을 감시관이 되어서도 버리지 못한 인물이다. 시빌라 시스템에 완전히 함몰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의 범죄 계수가 높아지는 것을 무엇보다도 두려워하고, 공안국에서 함께 일하는 잠재범들을 명확하게 하대한다. 죽어나갈 인명보다 자신이 지게 될 책임을 더 무겁게 생각하는, 어떤 의미에선 참 친근한 이 인물은 결국 가장 중요한 순간에 자신의 선배인 아카네를 배신하게 된다.

2기 중반 즈음에 시모츠키도 시빌라 시스템의 정체를 알게 되는데, 1기에서의 아카네와는 완전히 다른 반응을 보여준다. 제발 살려달라는 듯한 표정으로 “이 시스템은 정말 멋져요!” 하면서 박수를 치는데.. 아무리 봐도 공포에 질려있다. 그런데 정확히 무엇에 대한 공포일까 하는 게 파악이 잘 안 된다. 죽을 까봐? 잠재범으로 전락할 까봐? 실제로 시빌라 시스템은 1기에서 진실을 알게 된 카가리 슈세이를 제거한 전례가 있으니 둘 다 가능성은 있지만 나는 어쩐지 시모츠키가 느끼는 공포에 뚜렷한 대상이 없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시모츠키는 시빌라 시스템을 도입하기 전의 세상을 살아본 적도 없고, 역사를 배운 적도 없고, (시빌라 시스템 도입 이후 역사 과목은 사라졌다고 한다) 시스템에 대한 반감을 품는 것만으로도 범죄 계수가 올라가버리니 아마 시스템 바깥에 대한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사회 시스템의 민낯을 까발려 보여주었으니, “죽을 지도 모른다”와 같은 이성적인 판단이나 생각 자체가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마치 1984 에서 주인공이 굶주린 쥐들에게 잡아먹힐까봐 공포에 떠는 게 아니라 쥐들 그 자체로 공포에 떠는 것처럼. 물론 이 이후 시모츠키의 행적은 단순히 잘 몰랐고 서툴렀다는 변명으로 무마할 수 있는 수준의 것들이 아니기 때문에 옹호할 생각은 전혀 없다. 하지만 시모츠키를 단순히 악역 중 한 명으로 치부하기엔, 어쩐지 그녀가 아카네 같은 특수한 인물을 제외한 무능하고 무지한 인류 전체를 상징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2기 마지막 화에서 시모츠키가 보여주는 모습은 거의 타락에 가깝다. 엄연히 살인 사건의 공범임에도 불구하고 “꼭 범인을 잡아야 할 텐데요” 같은 말을 내뱉고 있는 모습을 보자면 1기의 수사물과는 아예 장르가 달라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아마 이대로 시빌라 시스템이 계속 진화해 나가면 언젠가 모든 인류는 시모츠키처럼 되고 말 것이다. 실제로 시스템은 시모츠키를 “가장 이상적인 시민”으로 생각했으니까.

아카네와 시모츠키의 이야기만 계속 했는데, 사실 1기에서 아카네와 함께 주인공을 맡고 있는 코가미라는 남자 캐릭터가 있다. 아카네가 결국 기본적인 사법 시스템의 틀을 벗어나지 않고 정의를 지키는 캐릭터라면 코가미는 그와 대조적으로 시스템이 해결해 주지 못하는 부분을 직접 해결하겠다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캐릭터다. 아쉬운 점은, 이미 시빌라 시스템이 사회의 모든 걸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코가미의 쪽이 훨씬 더 “택하기 힘든” 길인데도 코가미가 왜 이 길을 택하게 되었는 지에 대한 묘사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동료의 죽음에 깊게 분노해서 범인에게 집착한다는 설정이 있긴 하지만, 아카네 역시 1기에서 친구를 잃었고 2기에선 가족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코가미와 같은 길을 가지는 않았다. 처음엔 카우보이 비밥의 주인공 스파이크 스피겔을 오마주하여 만들어 낸 캐릭터 이미지에 감탄하며 봤지만, 어째 진행이 될 수록 스파이크의 야성적인 마초 이미지에 편승해서 분위기로 때울려고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에 코가미에 대해선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다. 극장판까지 보면 좀 다를지도.

비록 1기도 2기도 11화 안에 모든 스토리와 개연성을 담아내는 게 벅차서 갈수록 완급 조절에 실패하는 듯한 모습이 보이긴 하지만, 보고 나서 이 정도로 질문거리가 많이 남는 애니메이션은 처음이었다. 그 점에서 만큼은 감히 강철의 연금술사에도 비할 수 있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