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전체 일정

  • 10/22 프랑크푸르트 도착
  • 10/22 ~ 10/24 프랑크푸르트 (하이델베르크 당일치기)
  • 10/24 ~ 10/27 뉘른베르크 (밤베르크 당일치기)
  • 10/27 ~ 10/30 뮌헨
  • 10/30 ~ 11/3 리스본
  • 11/3 귀국

0-1.

어쩌다 이런 여행을 가게 되었나.

유럽 여행을 간다고 하면 바로 어디어디 가냐는 질문이 돌아온다. 독일과 포르투갈이라고 말하면 유럽을 좀 가본 사람들은 모두 ‘왜요?’ 하고 묻는다. 독일은 여행지로 유명한 곳이 아니고 독일과 포르투갈은 인접국도 아니다. 나는 반대로 다른 사람들은 여행지를 어떻게 정하는지 궁금하다. 독일에 가게 된 건 최근 19세기 독일 배경의 웹소설에 빠져 있기 때문이고 포르투갈에 가게 된 건 한때 페르난두 페소아를 참 좋아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독일과 포르투갈로 마음을 굳히고 계획을 짠 건 아니지만 이외에 도저히 갈만한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포르투갈은 지금처럼 여유로울 때 아니면 경로상 들르기 어려운 곳인 것도 결정에 한몫했다.

여행 준비물은 단촐했는데,

  • 24인치 캐리어와 백팩, 크로스백 하나씩. 캐리어는 좀 더 큰 거 들고 갈걸 그랬다고 나중에 살짝 후회하긴 했다.
  • 최고 기온 9도의 독일에 대비한 따뜻한 옷. 맨투맨에 기모 후드 입고 목도리 두르고 다녔다.
  • 최고 기온 20도의 포르투갈에 대비한 얇은 옷. 혹시나 감기 걸릴까봐 긴팔 입고 돌아다녔지만 반팔 티에 얇은 아우터가 최적이었을듯.
  • DB 앱, MVV 앱, 도이칠란드 티켓. 프랑크푸르트에서 뉘른베르크 갈 때만 ICE 기차를 따로 예매했다.
  • 가장 저렴한 로밍 요금제 가입. 데이터는 eSIM 을 따로 사서 해결했다.
  • 혼자 여행 다니면서 심심할 일 없도록 전자책 잔뜩 다운받은 오닉스 팔마.
  • 그리고 독일 여행이니까 독일 책도 한 권 챙겨줘야 할 거 같아서 『파우스트』도 챙겨갔다.

1. 독서 기록

1-1.

세계에 대한 모든 철학적 태도 중에서 가장 겁이 많은 태도는 분명 급진적 회의주의다. 모든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결코 실망하는 법이 없다. 게다가 의심은 까다롭지도 어렵지도 않고, 그러면서 겁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올바른 쪽에 서 있다는 감정을 쉽게 선사해 준다. 그런데 논리적으로 보면 의심에는 어떤 인식론적 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의심도 그 자체로 주장보다 더 진실하지 않다. 또한 무언가가 <틀렸다>는 것이 원칙적으로 무언가가 <맞다>는 것보다 더 개연성이 높지도 않다.

논리적인 관점에서 이러한 태도는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내가 모든 인식을 의심한다면 의심하는 것 자체에 문제가 없다는 것은 왜 의심하지 않는가?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면 의심 자체도 불확실하다. 그에 대해 피론과 같은 급진적 회의론자는 무언가를 믿는 것보다 무언가를 의심하는 것이 더 올바르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앎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탑승 기다리면서 책을 읽었다.

최근 『마차살』 때문에 서양 철학을 이것저것 파고들다가 서양 철학사 책을 한번 읽을 필요성을 느꼈다. 마침 『마차살』 Q&A 글에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의 『철학하는 철학사』 시리즈 추천이 있었고, 검색해 보니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차례차례 번역 중이었다. 총 4부작인데 1권이 『세상을 알라』, 2권이 『너 자신을 알라』, 3권이 『너 자신이 되어라』, 그리고 아직 출간되지 않은 4권 『세상을 만들어라』가 올해 말 ~ 내년 초 사이에 나올 예정이라고. 3권까지는 전자책도 나와 있길래 종이책과 전자책을 둘 다 구매했고 여행 다니는 동안 전자책으로 읽었다.

무언가가 <틀렸다>는 것이 원칙적으로 무언가가 <맞다>는 것보다 더 개연성이 높지도 않다.가 마음에 좀 크게 닿았다. 무언가가 <맞다>고 말하는 사람을 공격하긴 너무 쉽다. 이거는 예외가 있고 저것도 예외가 있고 세상엔 정답이 없다고 말하기란 너무너무 쉽다. 하지만 어쨌든 사람은 뭔가가 <맞다>고 믿고 살아야 한다. 그게 공동선이나 희망이든, 신이 있다는 믿음이든 '와 시대가 21세기인데 아직도 그런 걸 믿는다고?' 하고 비웃는 건 쉽고 불가지론에 머무는 건 언제나 안전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뭔가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대단한지도 몰라… 조심스러운 이야기.

1-2.

비행기는 대한항공 직항을 타고 갔다. 세금 다 붙어도 50만원이 되지 않는 가격에 인천 → 프랑크푸르트 항공권을 끊었는데 왜 그렇게 저렴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비수기라서? 여튼 인천공항 2터미널을 간만에 가봐서 좀 새로웠고, 위탁 수하물 부치는 여행도 간만이라 그것도 약간 긴장됐다. 하지만 가장 낯선 건 다름아닌 기내식이었다.

비행기를 열세시간이나 타는데 기내식을 한번밖에 안 주는 줄 알고 책 읽는 내내 메모장에다 ‘비행기가 사람을 굶긴다..’고 하염없이 썼다. 오전 11시에 비행기를 탔기 때문에 난 당연히 점심과 저녁 타이밍에 밥을 줄줄 알았는데 점심만 주고는 한국 시간으로 밤 10시가 되도록 저녁을 주지 않는 것에서 나는 진지하게 ‘혹시 저렴하게 타서 기내식도 한 번만 나오나?’ 생각했다. 아니 배고파 죽겠는데 밥이 안 나와 다들 쿨쿨 자 나만 안 자…. 다행히 도착하기 세 시간 전에 두번째 밥이 나오더라. 삼십분만 더 늦게 나왔어도 밥 달라고 떼쓰는 진상손님 될 뻔했다.

문득 조명 다 꺼진 비행기 안에서 살금살금 돌아다니는 스튜어디스 분들을 보며 스튜어디스란 유치원 선생님 같은 직업이구나 생각했다. 모두를 재워놓고 자기는 자면 안 되는 직업이란 점에서… 가끔 찡찡거리는 사람들 달래기도 해야 되고….

1-3.

그래도 독일 여행인데 독일 문학을 하나쯤 가져와야 할 거 같아서 챙긴 『파우스트』. 비행기 안에서 1/3 정도 읽었는데 초반부의 감상 : 주인공 약간 새 장르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오타쿠 같더라. 쌓아놓은 컨텐츠는 많은데 뭘 읽어도 마음에 차지 않고 옛날 그 장르 덕질할 때만큼의 희노애락이 안 느껴져서 고뇌하는 연성러 같았다.

연민한다는 뜻입니다.

1-4.

그런데 이러한 겸손의 가면 뒤에 있는 것은 전형적인 자기중심주의이다. 모든 사람이 정말 하나같이 플로티노스의 이상처럼 살아간다고 진지하게 상상해 보자. 누구도 더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결국 인류는 멸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밀교풍의 철학이 플라톤 철학의 완성본이라는 것은 의심스럽다.

플로티노스 철학은 정치적 지배권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스스로에 대한 자기 통제권의 중요성만 강조할 뿐이다. 정치에 대한 언급은 극히 일부에 그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대체로 피지배자들은 너무 어리석어서 현명한 지배자를 원하지 않는다. 설사 현명한 지배자가 나오더라도 불신과 시기에 시달리게 된다. 똑똑한 백성 없이는 똑똑한 정치도 없다.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수준에 합당한 그런 지배자를 모시고 산다.

비행기 안에서 조금 더 읽은 『세상을 알라』.

조명 다 꺼져서 어두컴컴하고 사람들 전부 자는데 나는 그 안에서 혼자 ‘정답!! 마차살!!’ 을 외치고픈 마음이 너무 컸다. 차살 화자는 개개인의 덕성을 굉장히 강조하는 편이고 모두가 자신을 돌아보며 덕성 있는 세계 시민됨을 추구하면 (인류의 문제가 해결)될 거란 주장을 자주 하는데, 듣다 보면 한번씩 ‘그래요?’ 하는 의문이 고개를 든다. 그렇게 내적 탐색으로 빠지는 건 뜻은 좋아도 결국 정치·사회에서 등을 돌리는 방향이 되지 않나. 그리고 스스로를 ‘덕성 있는’ 사람으로 두고 ‘덕성 없는’ 시민들에게 각성을 요구하는 그 우에카라메센도 석연치 않긴 마찬가지다. 심지어 차살 화자는 “그들은 스스로 설 줄 아는 덕성이 없어서 자신을 대신 일으켜 세워 줄 강력한 영도자를 원하고 그것을 대통령으로 선출한다고” 말한다. 진단을 그렇게 내리는 지점에서 뭔가 위험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재독하면서 했었는데, 마침 이 책의 플로티노스 챕터에서 비슷한 얘기가 나와서 반가웠다는 이야기.

그런데 이후 아우구스티누스는 분명 무언가 특별한 체험을 고안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긴 듯하다. 왜냐하면 플라톤주의자와 소요학파,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 같은 철학자는 깊은 생각을 통해 될 수 있지만, 무언가 큰일을 할 중요한 기독교인은 깊은 성찰로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말하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 환영을 보거나 신의 말씀을 듣고 개종하는 것이 계시 종교의 일반적인 특징이기도 했다.

이처럼 아우구스티너스만큼 성욕을 악으로 저주한 기독교 신학자나 그리스 철학자는 없었다. 그의 원죄론은 곧 기독교의 원죄론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고, 육체적인 것을 반복해서 죄악시하는 이 생각은 온갖 심리적 피해를 야기해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에 빠뜨렸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이미지가 급격하게 나빠졌다. 이 아저씨가 기독교의 원죄 같은데….

2. 프랑크푸르트 도착

2-1.

구글맵 이 미친 것

토요코인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으로 숙소를 잡았는데, 공항에서 길찾기를 눌렀더니 생뚱맞게 웬 버스를 타고 Gateway Gardens Nord 정류장에서 내린 다음 Gateway Gardens 역에서 S8/9 지하철을 타는 노선을 알려주었다. 분명 한국에서 미리 찾아봤을 땐 공항에서 바로 S8/9 지하철 탑승이 가능했던 거 같은데 왜지…. 하지만 당시엔 아무 의문 갖지 않고 그냥 구글맵이 시키는 대로 했다. 뭔가 이유가 있겠거니. 문제는 Gateway Gardens Nord 정류장이 웬 고속도로 한복판에 있고 거기서 내리는 사람은 나뿐이었으며 시간은 오후 7시가 넘어 벌써 해가 다 졌고 껌껌하고 지나다니는 사람 아무도 없고 버스 정류장에서 지하철역까지 도보 5분동안 이게 길이 맞나 싶은 수풀을 혼자 헤쳐야 했다는 것이다. 진짜진짜 너무 무서웠다. 혼자 ‘구글맵 이 미친 것..’ 하면서 캐리어 끌었다. 아니 진짜 나만 내리던데 길이 맞긴 하더라구요?? 이해할 수가 없었음.

2-2.

저녁은 케밥을 먹었다.

체크인하고 나니 이미 저녁 8시였다. 호텔 1층 식당도 영업 중이긴 했는데 가격이 심상찮아서 (30유로짜리 스키야키를 팔았던 것으로 기억. 근데 내가 유럽 온 첫날에 스키야키를 그 돈 주고 먹어야겠어?) 이미친것들 나는간다 하고 냅다 나왔다. 근데 길거리 조명이 너무 어둡고 사람들 막 길에 하릴없이 멍때리고 서 있는 게 무서워서 뒤늦게 동네.. 치안.. 을 한번 검색해 보긴 했다. 확실히 중앙역 앞은 평가가 썩 좋진 않더라. 하지만 지내는 동안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나중에 안 거지만 길에 하릴없이 서 있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흡연자였다.

Mildan Döner & Pizza 케밥 후기 : 여행 떠나오기 며칠 전 지인과 커피 한 잔 하다가 ‘당분간 밥 많이 남기겠네요~’ 멘트를 들었을 땐 아맞다 그렇겠네요 정도로 넘겼었는데 케밥 두 개에 감자튀김이 산더미처럼 담긴 접시를 보고 새삼 심각성을 깨달았다. 적게 먹는 편이 아닌데 그건 절대로 한 끼에 다 먹을 수 없는 양이었다. 케밥 하나는 남겨뒀다 다음날 아침으로 먹었고, 그렇게 먹어도 맛있긴 했다. 그리고 주인장 아저씨 굉장히 친절하셨어서 프푸를 또 갈 일이 있다면 재방문 의사 있음.

여행기가 원래 이렇게 쓰는 건가? 뭔가 이상하지만 킵고잉 해보겠음..